북한 수용소에서 귀환한 독일 수녀(2)
북 수용소 귀환 마지막
생존 독일 수녀. -제2편-
그들 수사들이 지은 집만으로는 주거 공간이 태부족이었다.
식구들은 다가오는 겨울에 대비해서 충분한 공간의 집부터 더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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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에 산촌 주민들이 살던 10채의 집을 해체해서 그 자재를 사용해서
집단생활에 맞는 집을 지어갔다.
그들은 자기 숙소 뿐만 아니라 소장과 감시병을 위해 집을 지어야했다.
추위가 닥쳐오자 공사는 추위로 인하여 난공사가 되고 말았다.
얼어 죽지 않기 위해서 남녀 성직자들은 죽을힘을 다하여 여러 집을 지었다.
건물 공사는 강제 수용소 생활 4년간 내내 계속되며 그 중노동으로 여러 사람을
저 세상으로 가게 했다.
새로 지은 부엌에 세 개의 큰 솥을 걸고 한국식 온돌을 놓아
나을 바 없는 집이 완성되었다.
조명을 위한 초나 석유가 보급되지 않아서 옥사독 식구들은
관솔을 사용해서 조명을 했다.
덕분에 남녀 식구들은 자고 나면 모두 콧구멍이 까맣게 변했다.
이 관솔 조명은이들이 옥사독을 떠날 때까지 내내 사용해야 했다.
성직자들에게 푸른 죄수 복 같은 것이 한 벌씩 지급되었지만
지대의 추위에 버틸 수가 없었다.
감시원은 어디서 북한군들이 입다가 버린 걸레 같은 옷을 주워 와서 던져주었다.
얼어 죽기 싫으면 이거라도 알아서 걸치라는 것이다. 이 넝마를 세탁을 해야 하는데
비누같은 것은 주지도 않았다. 바느질 하는 시게벨타 수녀는 나무를 태운 재를
이용해서 아쉬운대로 이 넝마를 세탁하고 수선해서 몸 치수가 맞는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넝마지만 얼어 죽는 것보다 나았다
신발 같은 것은 지급이 없어서 짚신을 만들어서 신어야 했다.
주방에 성냥도 없어서 힘들게 만든 불씨를 잿 속에 묻어놓고
해야 했었다.
식사는 최악이었다. 주는 것은 옥수수 콩 조 수수 따위였고 가끔 감자가 특식으로
지급되었다.
독일 수용자들은 봄이 되면 한국인들이 하듯 산과 들에서 먹을 수 있는 풀을 뜯어서
먹기도 했다.
식사담당 옵타다 수녀가 평양 교화소를 떠날 때 소장이 특식으로
씨앗을 모두 모아 간직하자는 제안을 했는데 이렇게 해서 옥사독에서 키운 토마토가
즐거운 간식거리가 되었다.
농장 수녀로 지명되어서 이산 저산 다니며 양치기를 했던 아르사시아 수녀는 살구나
머루 다래들의 야생 과일을 따와서 단것에 주린 수녀들의 입맛을 맞추어 주었다.
[아르사시아 수녀가 따온 머루로 미사용 포도주를 만들고 곡식 자루에서 건진 밀알을
모아 밀밭을 가꾸어 미사용 제병을 만들어서 미사를 거르지 않았다.]
60여 명의 수도가족에게 단 한 마리의 닭이 주어진 일이 있었다.
다 나누어 먹을 수가 없어서 닭요리는 산에서 힘든 일하는 수사들에게 보내졌다.
이 닭고기를 배달했던 아르사시아 수녀(3편 사진 참조)는 너무 고기가 먹고 싶어
돌아오는 길에 이 양동이에 물을 부어 다시 끓여 먹었다.
수도원 가족들은 쉬지 않고 농장일과 건물을 짓는 일을 해야 했다.
가두어질 수용소 감옥까지 건축했다.
이 정도는 약과고 감시원들과 그 가족들이 거주할 독립가옥까지 지어야했다.
얼마나 지독한 노동인지 에른스트 지이베르츠 신부가 증언을 들어본다.
[3편 사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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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집을 지을 때 진흙과 쇠똥 말린 가루 잘게 썬 볏짚에 물을 부어 이기는
일을 하였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진흙 속에 들어가서 맨발로 진흙을 이기고 있으니 발이
얼어서 고통스러웠다.
----어느 날 나는 작업 중에 진흙위에 막대기와 같이 쓰러지고 말았다.
이런 일은 며칠이 지난 후에 다시 일어났다.
야누아리오 수사님이 감시원에게 "이 분은 도저히 일을 계속하기 힘드니 쉬게
해주세요."했지만 감시원은 한마디로 안 된다고 거절했다.
나는 나무를 하나 베는데도 열 번을 더 넘어졌다.
나는 젊은 감시원에게 가서 ‘선생님’이라고 부른 뒤에
눈물이 흐르고 울음이 터지는 것을 참으며 “도저히 일을 못하겠습니다.”하니 그는
나를 쳐다보지도 않고 담배만 피우고 있었다.
--- ----소장을 직접 만나라는 소리에 소장에게 막상 가서 앞에 서게 되니 눈물이
앞을 가리고 목이 메어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이렇게 나는 어쩔 수 없이 자리에 눕게 되었고 여러 달 동안 몸이 부은 상태로
심하게 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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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사일 역시 지독한 중노동이었다.
독일 성직자들은 옛 한국 화전민과 꼭 같은 방식으로 가파른 산비탈 숲을 불태우고
남은 그루터기를 제거한 뒤 감자 조소로 이랑을 파서 옥수수 등을 심어야 했다.
소가 이랑을 일구면 가파른 산비탈에서 구르지 않게
멜빵을 멘 목판에 담긴 옥수수 알을 네 발로 기다시피 이 이랑에 옥수수를 심었다.
너무도 힘든 일이어서 소들은 밭갈이를 하다가 더는
밭고랑에 누어 버리기도 했다. 소가 중노동하는 것이 안쓰러워서 수도원 가족들은
아침마다 가마니에 절반쯤 채운 퇴비를 직접 등에 등짐을 해서 메고 목을 제치고
올려다 보아야하는 산언덕을 기어올랐다.
소를 이렇게 아낀 탓에 농사일을 위해서 처음 지급받은 한 마리의 암소는
옥사독을 떠날 때 무려 열 네마리로 불어났다.
일이 없는 농한기에는 숯을 굽고 새끼를 꼬는 중노동을
벨트비나 수녀는 한 시간에 7미터나 꼬는 실력을 발휘해서 감시원들로부터 7미터 동무
라는 별로 반가울 것도 없는 칭찬을 들었다.
이 정도 실력은 그 무렵 새끼 꼬기에 경험많은 시골 농부들도 따라하기 힘든 수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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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런 죄도 없이 심심산골로 내몰린 이 수도원 가족들을 더 죽음의 고통 속으로
내몬 인간이 있었다.
정모라는 내무서 소속 대위였다. - 북한은 경찰도 군대와 같은 계급을 쓴다.-
그는 1950년 4월10일 부임해왔다.
수도원 가족의 겪은 시련과 죽음의 장본인이기도 하였다.
잔인하기가 새디스트(변태 가학자)수준 이상이었다.
이 자는 아버지 같은 연장자인 수도원 가족들에게 욕을 함부로 하고 학대를 했다.
“이 개새끼들아 빨랑빨랑 걸으란 말야!”
독일 성직자들이 세월이 오래 지나도록 기억하는 이 쌍욕을 그는 버릇처럼 서슴치
않았다.
옥사독 가족은 이 자에게 살살이라는 별명[SCHLEICHE]을 붙여 주었다.
감시원들도 살살이를 따라서 자기 아버지 나이 또래의
반말과 욕지거리를 해댔다.
1952년 6월 28일 선종(천주교에서 말하는 사망)했던 안 아르눌프 쉴라이허 신부는
고통이 굶주림과 중노동보다 더한 고통이라고 유언같은 호소를 남겼었다.
1950년 한국 전쟁이 터진 줄도 모르고 시키는 강제 노동에만
가족들은 그 해 10월 23일, 갑자기 수용소에 나타난 북한군 군관이 내모는 대로
만포진 교화소로 이동했다. UN 군의 북진에 따른 피난이었다.
만포진을 거친 이들은 27일 두만강 건너 중국 집안으로 이동했다.
극한 추위속에 옥사독 식구들은 집안 정거장 앞마당에서 이틀간 노숙을 했다.
집결해 있으니 주민들이 몰려와서 미제 포로 놈들이 왔다고 욕을 하고 침을 뱉었다.
그들이 독일인 천주교 성직자들이라고 하자 비로소 모욕을 멈추었다.
그래도 솜옷을 입은 독일 성직자들은 그런대로 서로 부등켜 안고 추위와 싸워서
버티어 냈다.
그러나 바로 옆에 얇은 전투복만을 입고 끌려와 같이 노숙한 수백명의 국군 포로들은
낮에는 욕과 돌팔매 질을 당하고 밤이면 몇 명씩이나 얼어 죽어 아침이 되면 그
동사체들이 들것에 실려 나갔다.
비극적인 그 모습을 보고 독일 가족들은 공포와 슬픔을 견디어야 했다.
영하 20도의 추위 속에서 온몸이 얼어붙은 벨트비나 수녀가 거의 사경(死境)을
정도로 위독했었지만 겨우 목숨을 건졌다
만포진으로 돌아와서 다시 교화소에서 생활했다. 이 곳에서 카누토 신부가 선종했다.
그는 백작 가문 출신의 귀족이었다.
11월 12일 미군의 네이팜 폭격이 교화소에 가해지자 다시 관문리로 이동해서 가건물과
어두운 방공호에서 생활하다가 다시 이동하여 엉성한 초막같은 건물에서 겨울을
지내야 했다.
-이 관문리는 UN군의 포로 수용소가 있던 곳이었다.
[발진 티프스가 퍼져서 미군 포로들의 절반이 죽었기 때문에
죽음의 계곡이라고 불렀다.-]
남성 성직자들은 모두 동상에 걸려 이중에 얼어 죽거나 발가락이 빠지는 중상자
까지도 나왔다.
벌써 천지를 얼어붙게 만드는 이 압록강변의 생 얼음지옥에서 그레고리오 신부
힐라리오 수사 솔라노 수사가 저 세상으로 갔다.,
땅을 파는 기구도 없고 땅 깊숙이 얼어붙어 있어서
눈 속에 묻을 수밖에 없었다. 목격한 사람들이 있었다.
묘지 근처 동굴에 서울에서 납치해간 외국인 종교인들이 있었는데 3월이 되고
눈이 녹자 여우가 마구 헤친 시신의 뼈를 보았다. 뼈가 너무 길어 한국인의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매장 된 독일 성직자들의 것이었다.
관문리에서 여러 곳을 전전하는 중에 남녀 가리지 않고 어두운
남녀 공용의 소형 용변기 하나를 넣어주기도 했다.
목욕도 못하고 갇혀 있어서 거지꼴이 된 수도원 가족들은 전황이 공산 측에게 유리
하게 돌아가자 1951년 1월 17일, 86일간의 지옥생활을 끝내고 네 명의 가족을 잃은
채 다시 옥사독으로 돌아왔다,
강제 노동소이던 옥사독이 이 때는 이들에게 마치 고향같이 보였다,
그러나 이들의 고통은 계속 되었다.
먼동이 뜨면 기상하여 노동을 시작하고 어두어지기 시작해야
강제노동이 이어졌다.
아침 5시와 동시 일어나 일을 시작해야 하는데 도저히 일어나지
있으면 감시원들이 들어와 "죽으려면 밖에서 죽어!" 하며 내몰았다.
영양 부족으로 여러 환자가 생겨 밤이면 이들이 앓는 소리로
밤도 여러 번 있었다.
견디기 힘든 격노동을 할 때는 중간 중간 주어지는 5분간의 휴식시간에
저기서 흐느껴 우는 옥사독 가족들의 모습을 볼 때도 있었다.
겨울동안 장작을 패다가 경비원 숙소에 가지런히 쌓아놓은
해야 했다. 이 장작패기는 그래도 쉬운 노동이라고 나이 70 먹은 임 갈리스트
수사와 74세의 야누아리오 수사에게 주어졌다. 이런 고령자들에게도 중노동은
예외가 아니었다.
수용소 간부들의 마나님들은 미안해 하기는커녕 장작을 마구 처때고 더 가져 오라고
지시했댜.
원체가 식물류만 지급되었던 지라 육류를 많이 먹던
굶주려 있었다.
이들은 감시인들이 고기는 먹고 버린 소가죽에 붙은 기름기를 긁어서 한국식 곰탕을
끓여 먹기도 했다.
한번은 기르던 양이 병으로 죽어서 묻은 일이 있었다.
파내 끓여 먹기도 했다.
정말 먹을 것이라는 면에서 옥사독 식구들은 인간의 바닥까지 내려가 있었다.
이들 독일인 수도원 가족이 그래도 이 지옥에서 다수가 살아 남았던
신앙의 힘과 단체 생활에서 노동에 단련된 이외에 이 옥사독 식구들에 중요한 생존
기술을 가진 성직자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디오메데스 수녀는 의사였다.
그 녀가 없었다면 병에 걸려 숨을 거둔 수도원 가족들은 훨씬 많았을 것이다.
부족한 약품과 열악하기 짝이 없는 의료도구로서 그 녀는 환자들을 힘껏 구제해 냈다.
노동을 하다가 중상을 입거나 동상을 걸린 환자들은 물론
리바니아와 에메릭 수녀같은폐결핵 환자가 살아 돌아온 것은 오로지 이 디오메데스 수녀의 활약에 힘 있은바 컸다.
1952년 1월 30일 비토 수사가 수도원 가족들에게 감시원 전용 창고에서
바가지를 담아 가지고 나오다가 발각되었다.
그는 심한 욕설을 얻어먹고 내복만 입은 채 감옥에 열흘 넘게
감금되었는데 동사 일보직전에 감시원에게 발견되어 디오메데스 수녀의 치료로 목숨을 건졌다.
또 있다.
숙녀들에게 양장을 만들어 주던 솜씨 좋은 양재 전문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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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일상생활과 같이 자유자재로 의류를 구할 수 있다면 아무 걱정이 없었겠으나
수도원 가족들에게는 내복도 지급도 없었고 겨울철에는 장갑이나 양말 지급도 없었다.
이런 고급스러운 것 대신에 대신 광목천이 지급되어서 알아서 만들어 입으라는
지시였다.
그리고 거친 노동으로 각 남녀 식구들의 옷은 수시로 해어져서 수선을 해야 했다.
그 과중한 일을 그 녀는 몸이 약해서 중노동을 못하는 에와 수녀의 도움으로
눈 코 뜰 새 없이 완수했다.
수녀들은 펄프와 방직 찌꺼기[비날론 폐 섬유?]에서 실을 뽑아 천을 만드는
노동도 했는데 손으로 만든 물레로 실을 짜서 베틀로 천을 짰다.
도구들은 수사들이 창의력을 발휘해서 만든 것이다.
이것들은 북한군의 내복으로공출되었다. 일부는 살살이가 착복했다.
시게벨타 수녀는 여기서 남는 실을 살살이의 눈을 피해서 조금씩
내복을 만들어 입혔다.
북한 당국은 이들에게 수십 마리의 양을 공급했는데 이 털을 한 오라기라도 손을
대면 살살이는 미친개처럼 짖어대며 난리를 쳤다.
한 올이라도 손대는 자는 수용소 감옥행이 당연했다.
양치는 임무를 담당한 아리사시아 수녀는 양들을 찔레나무들이 있는 덤불
통과하여 덤불에 양털이 많이 걸려 빠지도록 했다.
이 덤불 가시에 걸린 양모는 몰래 수거되었다.
수녀들은 이 양모를 수사들이 버드나무로 만든 뜨개 바늘로 뜨개질을 하여
만들었다
시게벨타 수녀가 없었으면 겨울에 얼어 죽는 동사자들은 더 많았으리라.
또 있다. 취사 담당 옵타타 수녀[3 편 사진 참조]다.
그 녀는 4년 넘게 옥사독 식구들의 먹을거리를 담당했다.
옥수수나 콩, 수수들 수준의 잡곡만
맛있는 먹거리를 만들어 주도록 노력했다.
원산 수녀원장 겔투르드 수녀도 빼놓을 수가 없다.
항상 수녀들의 편에서 북한 당국에게 항의하고 탄원하며 요구를 관철했었다.
난폭했던 살살이도 겔트루드 수녀에게는 상스러운 말을 못하고 존중했었다.
남자 식구들을 잘 이끈 탁 파비안 신부도 있다.
옥사독 남자 식구들중에 덕원 수도원 목공소에서 일하던 솜씨 좋은 일데폰스
플뢰칭거 수사[52년 사망]와 에우세비우스 수사, 목공예가 야누리우스 수사,
대장장이 일데각종 철물을 만들어 내던 폰스 수사도 있었다.
옥사독 식구들이 만든 벽을 매끈하게 바르는 미장이 엥엘하르트 수사등이 있었다.
이들의 작은 솜씨들이 모이고 합쳐져 식구들이 이 지옥에서 살아나오는 기적 같은
일에 큰 도움이 되었다.
이렇게 힘든 상황에서 옥사독은 생활환경은 조금씩
세상을 뜬 남녀 성직자들이 많이 나왔다.
사람들을 이렇게 비인간으로 학대하니 신앙생활과 수도생활로 단련된 이들도 견디어
낼 수가 없었다.
더구나 이들 옥사독 식구들은 나이가 50이 넘은 고령자들이 많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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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려 17명의 남녀 성직자들이 이 이국의 산골에서 세상을 하직했다.
제일 먼저 숨을 거둔 식구는 이 산골에 본대가 도착하기 전에 미리 와서 집을
짓던 선발대중의 한 명이었던 베드로 게르네르트 수사였다.
그는 식구들 주류가 도착하기 전 1949년 7월 2일에 사망하여 숙소에서 200미터
떨어진 곳에 장례를 치른 최초의 식구가 되었다.
북쪽 만포와 관문리에서 세상을 뜬 네 명의 남자 성직자들을 빼놓고
성직자들이 세상을 떠서 옥사독의 언덕에 매장되었다.
원본 : '울프 독' 블로그(스크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