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MZ 넘어간 6명의 미 탈영병들
40여 년 전 북한으로 탈영했던 찰스 로버트 젠킨스라는
미군이 일본인 처 사가 히토미와 딸 둘을 데리고 일본으로
돌아온 사건이 있었다.
그가 일본에서 출판했던 ‘고백’이라는 책은 한국과 미국에도
번역되어 출판된바있었다.
젠킨스로 인해서 그간 역사의 잿 속에 묻어 두었던 월북
주한 미군들의 존재가 수면에 떠올라 관심을 받기 시작했다.
세계 부국인 미국 군인으로서 못 사는 아시아 공산국가 행을
택했던 예는 한국전쟁 이후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한국전중 중공군이 압록강변에 설치했던 벽동과 창성등의
포로 수용소에서 세뇌 당했다.
본국 송환을 거절하고 중국으로 갔던 미군이 무려 21명이나
되었고 영국군도 1명 있었다.
중국의 세뇌라는 것은 제갈량이 맹획에게 썼던
설득이나 감화로서 왕도(王道)를 주장한 맹자의 가르침에서
유래한다.
현대에서는 저항이나 도주 불능의 인질상황에서는
인질범에게 매달리는 심정이 되어 인질범에게 호감을 갖거나
동조하는 심리가 생성되는데 이 현상이 두드려졌던 인질 사건인
스톡홀름 사건을 따서 스톡홀름 증후군이라고 부른다.
[70년대 미국에서 발생했던 신문왕 허스트의 딸 패트리시아
허스트의 유괴사건이 이 증후군의 극단적인 경우다. 그 녀는
자신을 납치한 납치범들과 어울려 은행 강도질을 하기도 했는데
체포된 뒤 제정신이 들었다.
공군은 이런 포로 상황을 교묘히 노린 동양 고래의
이들은 중국으로 간 뒤에야 제 정신이 들어서 한 두 명 씩
미국으로 귀국했다.
- 영국군 해병 앤드류 콘드론 하사도 영국으로 돌아갔다-.
동구권 국가인 폴랜드나 체코 여자와 결혼해서 동구권으로
간 미군들도 있었고 미국 이민자였던 알버트 베롬 [Belhomme]
하사처럼 원래의 고향이었던 벨기에로 돌아간 미군도 있었다.
한 명만 빼고 모두 미국으로 모두 돌아왔다.
미국은 이들이 중국으로 간 뒤 모두 불 명예 제대 처분을 했지만
제정신 들어서 돌아오는 미군들을 특별히 처벌 하지는 않았다.
단지 제임스 베네리스 일병만은 중국에서 결혼도 하고
직장을 잡아 중국에서 일생을 마치고 2005년 중국에서 사망했다.
중국에 끝까지 남아 살다가 일생을 마친 제임스 베네리스와
중국인 부인.
그는 문화 혁명때는 홍위병의 눈치를 보느라 거리에 대자보를
붙이고 돌아 다니기도 했다.
중국명 온납(溫納).
주 은래는 베네리스를 진정한 국제주의 자유투사라고
격찬했었다. 생전 미국에 두 번 다녀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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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공산권으로 넘어간 미군이 한국전쟁 때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전쟁이 끝난 후에도 이어져서 총 6명의 주한 미군이
휴전선을 넘어 북한으로 탈영했다.
대부분 군대에서 버티기 힘든 개인적인 이유가 있어서
것이지만 이들 면면을 소개 해본다.
북한이 좋아서 넘어간 것이 아니라 모두 북한을 경유해서
소련으로 가고 싶은 계획이 있었지만 북한이 어떤 나라라는
것을 전혀 모른 무지에서 생긴 행동이었다.
북한은 이들의 의사에 반해서 북한에 억류하고 이용해먹었다.
북한으로 탈영한 미군들의 면면과 사연을 알아보자.
1. 래리 알렌 앱셔 일병 [1943-1983]
전후 최초로 월북한 미군인이다.
1962년 5월 월북했다.
일리노이 주 어바나 샴페인 출신이다.
북한은 1978년 앱셔에게 아노샤라는 납치 태국여자를 붙여주고
결혼을 유도했다.
그 녀는 마카오의 마사지 실에서 윤락녀로 일하다가 납치되어 왔다.
1983년 7월 11일 앱셔는 40세의 나이로 심장마비를 일으키고
사망했다.
결혼 후 부인 아노샤는 북한 당국에 의해 끌려가 독일인과
결혼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2. 제임스 조셉 드레스녹 일병[1940- ]
버지니아 리치몬드 출신.
지금도 평양에 살아남아 있는 미군이다.
드레스녹은 부모가 헤어진 결손가정에서
가지고 있었다. 부모들의 문제로 그는 남의 집에서 양육되었다.
가정 환경이 그래서 그랬는지 술도 잘 마셨고 성격이 과격했다.
그는 입대 뒤 독일에서 2년간 복무하고 귀국해보니 본처가
이혼을 요구하고 이미 그를 떠난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다시 입대하여 한국 휴전선에 배치되었다.
그는 휴전선 부대에서 근무 하던 중 위조한 외출증으로
외출을 했다가 미귀 사건을 일으켰다.
중대에서는 이를 보고했고 그는 탈영병으로 분류되었다.
그는 뒤늦게 귀대했지만 가짜 외출증에 위조한 지휘관
위조한 것임이 들통 나서 처벌 받게 되자 월북을 결심했다.
드레스녹은 앱셔보다 넉 달 뒤인 1962년 8월 15일, 백주 대낮에
[이 때에는 미군 부대 지역에도 철책선이 없었다.]
젠킨스의 회고록에 의하면 그는 북한에 아주 협력적이었고
폭력적인 성격으로서 어린 앱셔를 자주 구타했었다.
젠킨스가 이를 말리자 그는 젠킨스에게 증오심을 품고
30여회나 구타했었다.
그는 북한사회에 적응해서 살아가기로 작정하고 북한 당국에
적극 협력해서 여러 가지 일로 동료들을 괴롭히기도 했다.
북한에서 결혼을 세 번했다.
첫 번째 부인은 한국 여자였는데 헤어졌다.
두 번째 와이프는 북한이 루마니아에서 납치해온 도이나 부메아였다.
결혼 후 드레스녹과의 도이나 사이에 두 명의 아들을 두었다.
대학을 졸업했다.
제임스는 미국식 이름은 가지고 있지만 북한 억양이 강한 영어를
구사했다.
도이나가 폐암으로 죽자 드레스녹은 2001년 만난 북한 여자와
결혼했다.
몇 년 전 영국 영화 '경계선을 넘어서'라는 다큐멘타리에
출연해서 잘 알려져 있다.
3.제리 웨인 파리쉬 병장 [1944 -1996]
켄터키 주 모간휠드 출신.
휴전선을 넘어간 탈영병으로 자세한 것은 비교적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젠킨스의 책에 그가 다른 미군 즉 앱셔, 드레스녹 그리고 그와
같이 장기간 합숙 세뇌 교육을 받았다.
후에 다른 세 명의 여자와 함께 레바논에서 납치 되어온 시암
이라는 여자와 함께 결혼을 해서 세 명의 자녀를 두고 있다고
되어있다.
납치 되어온 네 명의 여자 중 한 사람이 부모와 연락이 되고
집단 납치 사실을 알게 된 레바논 정부가 항의하자 북한은
네 명을 모두 레바논으로 돌려보냈다.
그러나 시암은 임신한 것이 알려지자 부모는
북한의 패리쉬에게 돌려보냈는다.
그는 20년간이나 앓아온 신부전증으로 1996년 사망했고 그의
처와 자식들은 아직 북한에서 살고 있다.
4.찰스 로버트 젠킨스[1940- ]하사
노스캐롤라이나 리치 스퀘어 출신이다.
월북 미군 중에서 가장 유명해진 사람이다.
1955년 미군에 입대해서 월북시 군 생활 10년차였던
그는 그의 부대가 월남으로 이동한다는 소문에
1965년 1월 4일 새벽 분대 야간 순찰 중 월북했다.
그는 월북 시 맥주를 열 캔 이상 마시고 충동적으로 월북
했다고 했는데 술이 깨자마자 자기의 행위를 대단히
후회하기 시작했다.
그는 다른 월북자와 함께 생활하면서 주체사상을 교육받았고
영어를 가르치기도 하고 영화에 출연하기도 했다.
1980년 북한이 납치해온 일본인 21살의 일본인 간호원
소가 히토미와 만나서 사랑에 빠져 결혼하였다.
그 녀의 어머니와 함께 납치되어 왔으나 어머니의 행방에
대해서는 그 후 알려진바가 없다.
그 녀는 동해에 있는 사도 섬 출신으로 1978년,
의해서 어머니와 함께 납치되어 왔다.
그 녀는 북한 당국에 의해 젠킨스의 짝으로 주어졌다.
부자연한 만남이었지만 두 사람은 사랑에 빠져 만난지
만에 결혼했다.
두 사람 사이에 로베르타[1983년 출생]와 브린다
[1985년 출생]라는 두 딸을 두고 있다.
젠킨스는 2004년 일본과의 화해를 모색하는 김 정일의 의도와
납치 일본인들을 찾아오겠다는 일본의 의지가 결합되어
2004년 일본으로 건너왔다.
미군의 관용으로 6일 만에 불명예 제대의 처분만 받고
히토미의 고향 일본 사도 섬으로 이주, 현재도 살고 있다.
5.로이 정
월북 미군으로만 알려졌지만 신상에 대해 아무 것도 알려져
있지 않다. 1979년 월북했다.
성[chung]으로 보아 한국계인듯하나 중국계일 가능성도 있다.
6.조셉 화이트 [1961- 1985년]일병
미주리 주 세인트 루이 출신.
이 사람은 가장 늦게 월북한 미군이다.
1982년 8월 28일 탈영, 월북했다.
그는 비무장지대 통문의 열쇄를 쏴서 파괴하고 북으로 넘어갔다.
[이 무렵에도 미군들이 판문점 부근은 철책선에서 주둔했었다.]
그가 북한군의 영접을 받는 것을 동료 미군들은 보았다.
월북 뒤 그는 북한의 방송에 나와서 불안한 표정으로 미군의
그러고 그의 행방에 대한 아무런 정보가 없었는데 1983년
어머니는 그가 북한에서 행복하게 살고 있고 영어 선생으로
활동하고 있다는 그의 편지를 받았다.
1985년 11월 5일 어머니는 북한 정부로부터 그가 월북후
청천강에서
수영을 즐기다가 익사했다는 편지를 받았다.
이에 자세한 죽음의 설명을 요구하는 편지를 보냈지만 북한
정부로부터 아무런 답장이 없었다.
젠킨스는 그가 월북 뒤 북한 TV에서 기자 회견을 하는 것을
보았을 뿐 만나 본 일은 없다고 자기 자서전에서 밝혔다.
그러나 그 뒤에 이미 월북한 네 명의 미군 중 한 명과 같이
살도록 주선이 되었으나 실행이 안 되어서 의아하게 생각이
되었었다.
그러나 젠킨스는 북한 정부 관리가 화이트가 간질이 있었고
자주 발작을 해서 독신으로 살도록 놔두었다고 말했다고 했다.
월북한 미군들은 모두 북한이 아니라 소련행을 희망했었다,
그러나 기대치 않게 북한에 억류되자 60년대에 월북한 미군
탈영병
4명은 1965년 평양의 소련 대사관을 찾아가 정치적망명처를 요청했지만 소련은 이들을 모두 북한 당국으로 넘겼다.
이후 미국인들은 소련행의 희망을 포기하고 북한에서
사는 길을 찾았다.
북한은 네 명을 수도도 없는 한 가옥의 큰 방에 공동 구금하고
지루하기 짝이 없는 주체사상을 교육했다.
이들은 엄청난 양의 학습 내용을 암기해야 했다.
북한 당군은 미군들이 말을 듣지 않으면 자주 구타하는등,
야만적으로 대접했다.
이 생활은 10년이 넘는 1972년까지 계속 되었다.
북한이 소련 행을 희망하는 이들을 모두 억류해놓고 북한에서
강제로 생활하게 했던 것은 이들의 선전가치에 주목했었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미군 주둔했던 서부전선에서 선전용으로 쓰기위해서
대남 방송에 수도 없이 동원되었었다.
선전가치로서 약발이 떨어지자 이들을 영어강사로 활용하였다.
북한인들이 내이티브 스피커로부터 제대로 된 영어를
배우기가 힘든 상황에서 이들의 이용가치는 높았다.
대상은 평양 외국어 대학생이나 해외 파견 외교관
공작원들이었다.
그러나 별다른 재주가 없었던 이들의 영어 교습은 신통치가
않은 결과도 있었다.
젠킨스는 발음이 좋지 않다고 영어 선생직에서 해고 되었다.
북한 당국이 이들을 활용한 것은 반미 선전영화에서였다.
물론 악당 미국인 역으로서였다.
드레스녹은 현재 평양에서 낚시질로 소일하는 은퇴 노인이
되어서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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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출연은 이들의 생사를 모르고 있던 미 정보당국에 이들이
북한에 아직 생존하고 있음을 확인 시켜주는 결과를 가져 오기도 했다.
북으로 도망친 미군들은 막장의 심리 상황에서 충동적으로
것이었다.
젠킨스도 부대가 월남으로 보내진다는 불안감에 맥주 10캔을 마시고
후회하기 시작했다
운이 좋아 그 중의 젠킨스는 운이 좋아 40여년의 세월이 흘러 일본인
부인 소가 히토미와 함께 그녀의 고향 사도 섬으로 돌아오기라도
했지만 미국인들이 타민족인 북한인들 사이에서 폭력적인 북한
관리들 비위를 맞추며 살기가 편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중국으로 갔다가 비교적 늦은 1965년에 미국으로
중국인 부인과 자식을 데리고 돌아온 클로렌스 아담스.
그는 월남 참전 흑인 미군들에게 전쟁을 거부하라는
녹음 선전 방송을 하기도 하였다.
귀국후 고향 멤피스에서 중국집을 열었다.
그의 귀향은 타임지에 보도되었었다.
아담스뿐만 아니라 다른 미군들도 귀국하겠다고
했을 때 중국은 선선히 다 허락했었다.
1999년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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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내면 사실은 젠킨스의 자전 회고록 ‘고백’에서 여실히
증명해준다.
일본의 집중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먼저 일본에 다니러 간
히토미와 가족 결합을 하는데 21개월이 걸렸다.
[ 일본 정부는 김 정일이 임시 일본 방문을 허락한
일본인 피납자들의 북한 귀환을 막았었다.
이 때 김 정일은 50억달라 무상 원조를 기대하고
북한 고이즈미 내각과 국교 정상화를 추진하느라
피납 일본인들의 일시귀국을 허락했었는데 일본 여론만
엄청나게 나쁘게 자극했었다.
젠킨스와 두 딸은 일본 방문이 허락되지 않고 히토미만
먼저 일본을 방문했었다.]
지금도 주한 미군 중에 탈영병[AWOL,DESERTER]이 왕왕
발생해서 부대 게시판에 현상 수배가 붙는 것을 보게 된다.
그러나 휴전선 배치 미군이 없어서인지 아무도 북한으로
넘어가는 사람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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