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묵상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권연자 세실리아 2014. 11. 22. 14:16

 

 

 

 

2014년11월22일 연중 제 31주간 토요일 복음묵상

“천사들과 같아져서 더 이상 죽는 일도 없다.

그들은 또한 부활에 동참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루카2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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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부활이 없다고 믿고 있는 사두가이 사람들이 예수님께 질문을 던집니다.
나름대로 확실하다고 믿는 논리를 가지고 자신들의 믿음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려 합니다.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소신(所信)이라는 말이 있지요.
말 그대로 굳게 믿거나 생각하는 바를 말합니다.
누구나 어려서부터 ‘소신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는 말을 많이 들어왔으리라 봅니다.
하지만 이 소신이라는 말에는 위험 또한 도사리고 있습니다.
무엇인가를 굳게 믿는다는 것은, 믿는 사람을 움직이게 합니다.
만일 그 소신이 잘못된 소신이라면, 그 소신의 주인 역시 잘못된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옳은 믿음을 가지고 살 수 있다면 더 이상 좋은 일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결코 쉽지 않음을 우리는 삶을 통해서 뼈저리게 경험하고 있습니다.

누구에게나 통하는 절대적이거나 보편적인 소신이 있습니다.
아름다운 소신이지요.
하지만 우리의 삶은 다양한 상황 안에서 다양한 경우의 수를 만들어내고,

따라서 각자의 소신은 상대적이기 쉽습니다.
상대적 소신은 또 다른 상대적 소신과 만날 때 반드시 부딪히게 되어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소신을 지키기 위해 다른 소신을 꺾거나 심지어 죽이려고도 하지요.
독재자들 역시 스스로를 애국자로 믿고 있었던 예는 인류의 역사에서 수없이 찾을 수 있습니다.

늘 자신이 가지고 있는 소신이 아름다운 것인지, 아니면 추한 것인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살리는 소신인지, 죽이는 소신인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옳음 때문인지, 아니면 이기심 때문인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적어도 자신이 가지고 있는 소신이 어떤 과정과 결과를 만들어낼 것인지를 항상 의식해야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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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

가끔 하느님 나라는 어떤 나라냐고 질문하는 분들께서 계십니다.
가본 이가 없으니 어떻게 생겼다고 설명할 이들도 없겠지요.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공간 개념이나 시간 개념으로 이해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유한성을 지닌 인간의 생각이 무한을 이해할 수 없음과 같이,

무한이나 영원에 대한 구체적인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유한성을 벗어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그리고 성령의 도우심으로 표현된 바오로 사도의 증언을 통해서

‘하느님 나라’, ‘영원한 생명’, ‘부활’에 대한 개념을 가늠할 뿐입니다.

누군가 물어보면 이렇게 대답하십시오.
하느님 나라에 산다는 것은, 하느님의 한 부분이 된다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바오로의 서간을 통해서 묵상해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같이 죽어서 그분과 하나가 되었으니

그리스도와 같이 다시 살아나서 또한 그분과 하나가 될 것입니다.” (로마서6,5)

“때가 차면 이 계획이 이루어져서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이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고 하나가 될 것입니다.” (에페소서1,10)

“죽은 이들의 부활도 이와 같습니다. 썩어 없어질 것으로 묻히지만 썩지 않는 것으로 되살아납니다.

비천한 것으로 묻히지만 영광스러운 것으로 되살아납니다.

약한 것으로 묻히지만 강한 것으로 되살아납니다.

물질적인 몸으로 묻히지만 영적인 몸으로 되살아납니다.

물질적인 몸이 있으면 영적인 몸도 있습니다.” (코린토1서15,42-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