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여행/터키 16

안탈리아지방

독일 하노버에 살고 있을 때, 독일 여행사에서 터키행 여행을 광고하기에 그곳에서 간다면 비행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는 거리라는 이점 때문에 덜컥, 신청했었다. 여행을 떠나는 날 하노버 공항에 모인 일행들을 보니 모두 독일인들이고 유색 인종은 우리 부부 두 사람 뿐이었다. 200여 명이 탈 수 있는 자그만 비행기에 앉아서 옆을 보아도 앞과 뒤를 보아도 모두 쓸데없이 코가 높은 그 사람들만 보이니 잠시 무엇엔가 포위 당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아마도 좁은 공간에 우리만 이방인이란 생각 때문이었을 것이다. 터키 남부의 안탈리아 지방 지중해변에 있는 리조트에 며칠 묵게되었는데, 첫 날 밤 어찌나 추웠는지... 난방이 되지않아 사람을 불러 지붕 속에 있는 난방기를 손보고, 고쳤다는 난방기에선 여전히 찬 바람이 나오..

<터키> 티아티라(Thyatira) 교회 유적

티아티라는 소아시아 서쪽 루카스 강변에 있던 성으로 동남쪽의 사르디스와 서쪽의 페르가몬을 잇는 길 사이에 위치해 있는 곳이다. 기원전 680년경의 리디아인들이 티아티라와 사르디스 일대에 리디아 왕국을 건설했다. 리디아 왕국 때부터 페르가몬, 비잔틴, 사르디스, 스미르나의 교차지이며 상업도시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곳이다. 예로부터 꼭두서니 뿌리에서 추출한 물감으로 만든 값비싼 비단과 자색 옷감 생산지로 유명한 곳인데, 사도 바오로가 2차 전도여행 중 마케도니아의 필리피(Philippi) 도시 외곽에서 만난 옷감장수 '리디아'(Lydia)도 이곳 리디아 출신의 상인이었다(사도 16,11-15).

<터키> 스미르나의 순교자 '폴리카르프(Polycarp)' 주교 기념 성당

'스미르나'(Smyrna)는 오늘날 인구가 200만 명이 넘는 '이즈미르'(Izmir)로 이스탄불, 앙카라에 이어 터키 세 번째의 도시이다.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오스만 제국이 몰락하고 공화정이 들어서면서 도시 이름도 스미르나에서 이즈미르로 바뀌었다. 스미르나에는 일찍부터 그리스도교 복음이 전파되었고 초대교회가 세워졌다. 스미르나 교회는 사도 요한의 수제자인 순교자 '폴리카르프'(Polycarp) 주교가 시무(施務)한 곳으로 '폴리카르푸스 교회'라고도 한다. 폴리카르프는 예수의 직제자들과 교부들 사이에 연결고리 역할을 한 중요한 교부이다. 160년 교회가 환난을 당할 때 체포되어 로마 총독이 "내 앞에서 예수를 부인하면 살려 주겠다"고 회유하였으나 "지난 86년 동안 나는 예수님을 섬겼으나 그분은 나를 ..

<터키> 사르디스(Sardis) 교회 유적

사르디스(Sardis)는 기원전 600-546년까지 리디아(Lydia) 왕국의 수도였다. 성읍은 해발 450m인 트몰루스 산의 돌출부 고지 위와 고지 아래 계곡 두 곳이다. 이 도시는 기원전 6세기에 아주 부강한 도시였고, 난공불락의 도시였다. 그러나 기원전 546년 페르시아 고레스 왕과 218년 아티오쿠스 3세의 침략을 받고 함락됬다. 오늘날 사르디스는 4세기에 세워진 교회와 중세 비잔틴 시대에 세워진 두 교회가 남아있다. 사도 요한 당시 사르디스 지역에서는 금이 많이 생산되어 최초의 주화인 금화가 만들어진 곳이다. 4세기의 교회는 웅장한 아르테미스 신전 유적의 남동쪽 모퉁이에 작은 건물로 세워졌다. 사르디스 교회 제대부분 아르테미스 신전과 모퉁이에 지어진 작은 교회의 모습 해발 450m인 트몰루스 산..

<터키> 필라델피아(Philadelphia) 교회 유적

요한 묵시록은 일곱 교회 가운데서 오직 스미르나 교회와 필라델피아 교회만은 나무라지 않았다. 필라델피아 교회는 오히려 칭찬을 받은 교회이다. (관련 성경구절 : 요한 묵시롤 3,7-13) 이곳은 사르디스(Sardis)와 페르가몬(Pergamum) 그리고 라오디케이아(Laodicoa)와 히에라폴리스(Hierapolis) 사이에 위치하고 있어 이들을 잇는 중요한 교통의 요지였다. 언제부터 이곳에 교회가 있었는지는 명확치 않으나, 일찍부터 순교자가 나온 지역이다. 스미르나의 폴리카르푸스가 순교할 때 필라델피아의 신자 10명도 함께 순교 하였고 자주 일어나는 지진으로 이곳 신자들은 불안했으며, 이 불안은 이들의 신앙을 뜨겁게 했다. 유적으로 남아 있는 사도 요한 성당은 비잔틴 시대에 지어진 것이다.

<터키> '라오디케이아(Laodicoa)' 교회 유적

에페소의 동쪽150km에 있으며 AD 60년의 지진으로 페허가 되어 십자가와 기둥 등 무너진 벽체가 흩어져 있을 뿐이다. 히에라폴리스의 뜨거운 온천물이 9km가 떨어진 라오디케이아까지 흘러오면서 물이 미지근하게 된다. 그래서인지 요한 묵시록의 작가는 이 교회를 이런 표현으로 호되게 꾸짖었다(묵시 3,14-22). (묵시록의 일곱 교회) "나는 네가 한 일을 안다. 너는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다.(중략) ...네가 이렇게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않고 차지도 않으니, 나는 너를 입에서 뱉어 버리겠다." 이곳의 신자들은 물질적으로는 풍요로웠으나 영적으로는 가난했기 때문이다. 또 이곳은 묵시록의 기록처럼 '후루기아(Phrygia)라는 안약 원료의 생산 으로 유명한 곳이었다.

<터키> '트로이(Troia)' 유적

트로이 전쟁과 트로이 목마 이야기는, 그리스의 작가 호메로스(BC 800-BC 750)가 쓴 일리아드(Iliad) 오디세우스(Odysseus)에서 신화로 전해 오다가 1870년 트로이 유적지(1998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됨)를 발굴함에 따라 역사적 사실일 가능성이 높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는 이야기이다. 트로이 전쟁(Trojan war BC. 1200년경)은 트로이군과 그리스 도시국가들의 연합군(총사령관: 아가멤논)과의 사이에서 일어난 전쟁이지만, 크게 보면 미케네 문명(BC 1600-BC 1100) 과 트로이 문명(Troian Culture BC 3000-BC 1100)간의 전쟁이었다고 한다.

<터키> '에페소' 유적

바오로 사도 시대만 해도 번창한 항구였으나 '카이스트로스'강을 타고 흙이 씻겨 내려와 지금은 배가 드나들지 못하고 바다와 큰 거리가 생겼다고 한다. 초대 교회 때 사도 바오로가 2차, 3차 전도여행을 하며 머물었던 곳으로 사도행전에 기록되어있는 곳이고, 사도 요한은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부탁하신 말씀에 따라 마리아를 모시고 이곳에 와서 살면서 요한복음과 요한서간을 저술하였고, 그 후 이교도들에게 밧모섬으로 유배되어 요한 묵시록을 저술하였다. 4세기 경에 에페소는 소아시아의 그리스도교 중심지가 되어 AD 431년에는 '에페소 공의회'가 열리기도 했던 곳이다. 사도 요한이 예수님의 어머니를 모시고 에페소에 와서 살 때 마리아께서도 요한을 도와 여러가지 봉사활동을 하셨다고 하는데 예수님의 어머니라는 사실이 ..

<터키> '파묵칼레'(히에라폴리스)

히에라폴리스(Hierapolis)는 지금의 터키어로 파묵칼레(Pamukkale)라고 하는데 '목화성(Cotton Castle)'이라는 뜻이다. 이곳 온천물에 칼슘이 많이 싸여있어 멀리서 보면 흡사 만발한 목화송이로 뒤덮인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온천물은 섭씨 35도로 특히 심장병, 소화기 장애, 신경통 등에 효과가 있다고 한다. 로마시대에는 로마의 황제들도 이 온천에 찾아왔다고 한다. 온천물에 함유된 칼슘이 쌓이고쌓이며 흘러내린다 저 멀리 아래에 마을이 보인다. 그곳 까지도 온천물이 흘러내리고... 석회암이 만들어 놓은 무늬 히에라폴리스의 유적들 이곳에서 방금 결혼한 신랑 신부를 만났다. 온천 수영장 호텔에서 바라본 석양 호텔에서 보는 밸리 댄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