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읽고싶은 詩 53

흔들림에 대하여

바람부는 언덕 위 홀로 서 있는 나무를 보며 흔들리지 않고 고개 숙이지 않으려 무던히 버티는 중인 줄만 알았다 바람 세차게 부는 날 언덕 위 홀로 서 있는 나무에 기대어보니 알겠다 되려 온 몸에 힘을 쭉 빼고 바람 부는대로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잠긴 마음의 빗장을 열고 영혼의 숨결에 귀를 대보니 알겠다 나무의 몸에서 바람이 울고 있다는 것을 바람은 목소리가 없어 나무가 대신 소리내어 울고 있다는 것을 홀로 서서 다 같이 사는 세상 삶의 어느 언덕에서 나 그 무엇을 위해 몸의 한 편 내어준 적이 있었던가 그 누군가에게 도움짓 한 적이 있었던가 산다는 일이 그런 것이라면 진정 그게 그런 것이라면 바람 가득 가슴을 풀어 흔들리고 너와 나의 아픔에 정직하게 고개 숙이고 싶다. 인애란 시인

추억 하나쯤은

추억 하나쯤은 꼬깃꼬깃 접어서 마음속 깊이 넣어둘 걸 그랬다. 살다가 문득 생각이 나면 꾹꾹 눌러 참고 있던 것들을 살짝 다시 꺼내보고 풀어보고 싶다. 목매달고 애원했던 것들도 세월이 지나가면 뭣그리 대단한 것도 아니다. 끊어지고 이어지고 이어지고 끊어지는 것이 인연인가 보다 잊어보려고 말끔히 지워버렸는데 왜 다시 이어놓고 싶은 걸까 그리움 탓에 서먹서먹하고 앙상해져버린 마음 다시 따뜻하게 안아주고 싶다. 용혜원 시인(1952.2.12~ )

서시(序詩)

간이식당에서 저녁을 사 먹었습니다 늦고 헐한 저녁이 옵니다 낯선 바람이 부는 거리는 미끄럽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여, 당신이 맞은편 골목에서 문득 나를 알아볼 때까지 나는 정처 없습니다 당신이 문득 나를 알아볼 때까지 나는 정처 없습니다 사방에서 새소리 번쩍이며 흘러내리고 어두워가며 몸 뒤트는 풀밭, 당신을 부르는 내 목소리 키 큰 미루나무 사이로 잎잎이 춤춥니다 -이성복(1952~) 내가 읽은 서시 중에 가장 아름다운 서시. 시집 ‘남해 금산’의 첫머리에 나오는 시인데, 젊은 날 이성복 시인의 날카로운 감수성과 순수한 열정이 우리를 긴장시킨다. 그냥 그렇고 그런 상투적인 표현이 거의 없고, 쉬운 듯 어렵고 어려운 듯 쉬운 시다. ‘늦고 헐한’ 저녁. 싸구려 간이식당에서 저녁을 사 먹은 시인은 사랑을 (혹..

선물(Gifts)

나는 첫사랑에게 웃음을 주었고, 두 번째 사랑에게 눈물을 주었고, 세 번째 사랑에게는 그 오랜 세월 침묵을 주었지. 내 첫사랑은 내게 노래를 주었지, 두 번째 사랑은 내 눈을 뜨게 했고, 아, 그런데 나에게 영혼을 준 건 세 번째 사랑이었지. -사라 티즈데일(Sara Teasdale·1884~1933) 미국의 여성 시인 사라 티즈데일은 서정적인 연애시를 많이 남겼다. 사랑에게 무엇을 준다는 문구의 반복, ‘눈물’ ‘노래’ ‘침묵’ 같은 단어들은 그녀의 다른 시 ‘아말휘의 밤 노래’를 연상시킨다. “나는 그에게 울음을 주고 / 노래도 줄 수 있으련만-/ 어떻게 내 온 생애가 담긴 침묵을 주리오?”로 끝나는 ‘아말휘의 밤 노래’를 줄줄 외다시피 좋아했었다. 첫사랑이 (이 시에서처럼) 웃음과 노래로 시작하는 ..

그 꿈 다 잊으려고

그 꿈 다 잊으려고 밤마다 꿈을 꾸어도 아침마다 대개는 잊어버리고 어쩌다 한 토막씩 말도 안 되게 남아 있다 나는 한평생 얼마나 많은 꿈을 꾸었나 잊어도 좋은 꿈들이 세상에는 얼마든지 있고, 꿈꾸며 살 날은 얼마 남아 있지 않다 나는 한평생 얼마나 많은 꿈을 잊었나 사는 게 잊어버리는 연습이라면 말도 안 되게 남은 꿈들은 언제 다 잊을 것인가 그 꿈 다 잊으려고 아침마다 잠이 모자라나보다 아침마다 말도 안 되는 몇 토막 그리움으로 모자란 채로 나는 남는다 정양(1942년∼) 박태원의 소설 중에 ‘적멸’이라는 작품이 있다. 1930년 동아일보에 연재되었던 소설인데 거기에 이런 구절이 등장한다. “인생은 꿈이다. 그리고 인생이 좇고 있는 것도 꿈이다.” 무려 90년 전에 박태원은 이미 알았던 것이다. 인생이..

어느 날의 커피

어느 날, 혼자 가만히 있다가 갑자기 허무해지고 아무 말도 할 수 없고 가슴이 터질 것만 같고 눈물이 쏟아지는데 누군가를 만나고 싶은데 만날 사람이 없다. 주위에는 항상 친구들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런날, 이런 마음을 들어줄 사람을 생각하니 수첩에 적힌 이름과 전화번호를 읽어내려가 보아도 모두가 아니었다. 혼자 바람맞고 사는 세상 거리를 걷다 가슴을 삭이고 마시는 뜨거운 한잔의 커피 아.. 삶이란 때론 이렇게 외롭구나. -이해인 시인님.-

안녕 내 사랑 (Bella Ciao)

어느 날 아침 일어나 오, 안녕 내 사랑, 안녕 내 사랑 bella ciao… 어느 아침 일어나 나는 침략자들을 발견했지. 오 파르티잔이여, 나를 데려가 주오. 안녕 내 사랑, 안녕 내 사랑 bella ciao… 파르티잔이여, 나를 데려가 주오. 나는 죽음이 다가옴을 느끼고 있어. 내가 파르티잔으로 죽으면 안녕 내 사랑, 안녕 내 사랑 bella ciao… 내가 파르티잔으로 죽으면 그대 나를 묻어주오. 나를 저 산에 묻어주오. 안녕 내 사랑, 안녕 내 사랑 bella ciao… 나를 산에 묻어주오. 아름다운 꽃그늘 아래 사람들이 그곳을 지나가며 안녕 내 사랑, 안녕 내 사랑 bella ciao… 사람들이 그곳을 지나가며 “아름다운 꽃”이라고 말하겠지. 파르티잔의 꽃이라고, 오 안녕 내 사랑, 안녕 내 사..

달 빛

있어야 할 것들은 없고 없어도 내버려도 되는 끼리끼리 겨울밤이 깊다 칼을 갈던 바람도 자고 소용도 없이 혼자 남아서 보고 싶어서 미쳐서 우는 천벌처럼 막막한 달빛 몽당빗자루에 쓰러지는 달빛 고무신짝에 고이는 달빛 주저앉은 항아리에 달빛이 샌다 겨울밤 끝까지 쏘다니는 쥐새끼들이 천벌처럼 그 달빛을 뒤져쌓는다 시집 '빈집의 꿈' / 정양

우화(寓話)의 강

사람이 사람을 만나 서로 좋아하면 두 사람 사이에 물길이 튼다 한 쪽이 슬퍼지면 친구도 가슴이 메이고 기뻐서 출렁거리면 그 물살은 밝게 빛나서 친구의 웃음소리가 강물의 끝에서도 들린다 처음 열린 물길은 짧고 어색해서 서로 물을 보내고 자주 섞여야겠지만 한 세상 유장한 정성의 물길이 흔할 수야 없겠지 넘치지도 마르지도 않는 수려한 강물이 흔할 수야 없겠지 긴 말 전하지 않아도 미리 물살로 알아듣고 몇해를 만나지 못해도 밤잠이 어렵지 않은 강 아무려면 큰 강이 아무 의미도 없이 흐르고 있으랴 세상에서 사람을 만나 오래 좋아하는 것이 죽고 사는 일처럼 쉽고 가벼울 수 있으랴 큰 강의 시작과 끝은 어차피 할 수 없는 일이지만 물길을 항상 맑게 고집하는 사람과 친하고 싶다 내 혼이 잠잘 때 그대가 나를 지켜보아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