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여행

배티 성지

권연자 세실리아 2010. 10. 12. 21:13

 

          소재지 : 충북 진천군 백곡면 배티로 663-13 (양백리 289)

 

          진천군 백곡면 양백리 노고산 아래 위치한 배티성지는 많은 순교자의 종교정신을 기리고

          기도하는 장소와 피정의 집으로 활용되었으나 십자가와 묵주만이 남아 천주교 박해의

          정도를 가늠케한다.

 

         동네어귀에 배나무가 많은 배나무 고개라서 이치란 말이 생겨났고 이것이 순수한 우리말로

         배티라 불리게 되었다는 설과, 조선 영조때 이인좌가 난을 일으켰을 때 백곡을 지나다 이 마을

         노인 이순곤이 이끄는 주민에게 패한 뒤 다시 안성쪽으로 향하다 오명황이 이끄는 관군에게

         진압 패전하였다는데서 패치라 불리우다 바뀌었다는 설이다.

      

         1870년부터 다시 신앙이 싹터 1884년에는 선교사들이 진천에 배티, 삼박골, 용진골, 새울,

         굴티등 5곳에 공소를 설정하게 되었으며 1890년에는 배티공소에 "교리학교"가 세워지기도

         했다. 그러나 일제시대에 신자들이 하나, 둘 떠나 현재 이곳 배티에는 신자들이 생업을

         영위하던 옹기점과 무명순교자의 묘 만이 남아있다.

         (자료 출처 : 진천군 문화 관광부)

 

            

             

             (위 사진은 진천군 문화 관광부처에서 옴겨온 것임)

                                                                                                                        

   

       한국 천주교회가 100년의 박해를 받는 동안, 신앙 선조들은 그 누구도 살 수 없을 정도로

       척박한 산간 지대로 들어가 몸을 숨긴 채 살아가야만 했다. 바로 그 시절 이곳 '배티' 골짜기와

       산 너머 이곳저곳에는 비밀 교우촌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그래서 모방(나 베드로) 성인

       신부님은 1836년에 처음으로 이곳을 방문하여 성사를 주었다.

 

 

        기해박해(1839년)와 병오박해(1846년)를 거쳐 1866년의 병인박해가 일어날 때까지 교우촌 수는

        더욱 늘어났다. 기록에 그 이름이 보이는 교우촌만 해도 배티, 삼박골, 은골을 비롯하여 정삼이골,

        용진골, 절골, 지구머리, 동골, 지장골, 발래기, 퉁점, 조금 떨어진 원동, 새울, 굴티, 방축골 등

        15곳이나 된다. 오죽하면 한국 천주교회의 카타콤브(Catacomb)라 불리울까!

 

 

       신자들은 하늘을 가린 나무와 구름이 박해자들의 눈과 귀를 가려주도록 기원하면서 움막을 짓고

       화전을 일구고, 숯가마를 운영했다. 그들은 두려움 속에 하루하루 살아가면서도 언젠가는 영원한

       천당의 복락을 얻을 수 있다는 희망을 잃지 않았다.

 

        다블뤼(안 안토니오) 성인 주교님은, 아직 신부였을 때인 1850년에 교구장 페레올(고 요한)

        주교님으로부터 '조선교구 소신학교' 설립의 명을 받았다. 그래서 배티 교우촌 안에 신학교

        교사(소성당 및 사제관 겸용)로 사용할 집을 마련했다. 교우촌 가운데 위치한 방 두 칸짜리

        초가집이었다.

 

        다블뤼 교장 신부님은 1853년 여름까지 배티에 상주했다. 그러다가 다시 교우촌 순방에 나섰고,

        그 뒤를 이어 최양업 신부님이 배티 신학교를 맡았다. 최양업 신부님은 신학생들을 지도하면서

        그들의 유학도 준비했다. 그 결과 1854년 3월에는 신학생 3명(임 빈첸시오, 김 사도 요한,

        이 바울리노)이 말레이시아의 페낭 신학교로 유학을 떠나게 된다. 이후 배티 신학교는 문을

        닫지만, 초가집 성당 겸 사제관에는 최양업 신부님, 프티니콜라(박 미카엘) 신부님, 페롱(권

        스타니슬라오) 신부님 등이 오랫동안 거처했다.

 

 

                             최양업 토마스(1821-1861년) 신부님은

                  한국 천주교회의 첫 번째 신학생이었고, 두 번째 사제이다.

                최경환(프란치스코) 성인과 이성례(마리아) 순교자의 장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