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여행

윤지충 바오로와 권상연 야고보의 발자취를 따라...

권연자 세실리아 2010. 9. 18. 16:15

 

그리스도교 역사를 살펴보면, 한국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선교사들의 도움없이 자생적으로

그리스도교 신앙이 싹트고 자란 곳이다.

중국을 왕래하며 새로운 학문에 대한 욕구가 강했던 양반들에 의해 조선으로 들어오게 된

책(천주교 교리책)을 공부하다가 깨닫게 되고 받아들인 종교가 천주교였다.

 

그후 나라에서 금하는 종교로, 끝까지 배교하지 않은 신자들로 인해 많은 순교자가 생겨났고,

이미 여러가지 역사적인 검증을 거쳐 103위 성인이 태어났다.

그러나 103위 성인들보다 먼저 순교한 많은 분들이 아직 시복시성의 자리에 오르지 못하고

있는데, 검증을 거친 124위 순교자들과 우리나라 두 번째 신부인 최양업 신부님을 합해 125위를

시복시성 대상으로 기도하고 있다.

 

이번 시복시성을 위한 순교자들 중, 윤지충 바오로와 권상연 야고보는 우리나라 순교자들 중

최초의 순교자 들이다.

이들은 충청남도 진산 출신들이었기에, 이분들의 발자취를 따라가보기 위해 그곳을 찾아가 보았다. 

 

 

윤지충은 진산 장구동에서 태어나 1783년 봄에 진사 시험에 합격하였고, 이무렵에 고종 사촌

정약용 형제를 통하여 천주교 신앙에 대해 알게 되었다. 스스로 교회 서적을 구해 3년 동안 교리

공부를 한 그는 1787년 인척인 이승훈 베드로에게 세례를 받았고, 어머니와 아우 윤지헌,

외종사촌인 권상연에게도 교리를 가르쳐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이게 하였다.

그리고 인척인 유항검 아우구스티노(전주 치명자 산에 그 일가의 묘가 있고, 초남이에 그들이

살던 집이 파가가 된채 연못이 된곳과 복원된 그들의 집이 있다.) 와 자주 왕래하면서 복음을

전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1790년 북경의 구베아 주교가 조선 교회에 제사 금지령을 내리자, 윤지충은 권상연과 함께

이 가르침을 따르기 위해 집안에 있던 신주를 불살랐다. 그 이듬해 여름 어머니가 사망하자

유교 제사 대신 천주교의 예절에 따라 장례를 치렀는데, 이 소문이 조정에까지 전해져 체포

명령이 진산 군수에게 내려졌다. 체포령을 들은 윤지충은 충청도 광천으로, 권상연은 충청도

한산으로 피신하였다. 그러자 진산 군수는 윤지충의 숙부를 감금하였고, 이 사실은 전해 들은

그들은 1791년 10월 중순경 진산 관아에 자수하였다.

 

 

위의 내용들이 그 당시 유명했던 '진산 사건'이다.

진산은 원래 군(郡)이었으나 윤지충 사건과 관련하여 1791년부터 5년간 현으로 강등되기도 했다.

그의 제사 거부가 불충불효의 죄에 해당하기 때문에 지역 전체가 연좌제의 벌을 받은 것이다.

윤지충은 윤선도의 후손인 양반으로 조정에서도 그 가문을 알고 있었기에, 그 사건을 접하고

왕도 고민했다고 한다.

정조는 이 사건이 정치적으로 확대되지 않도록 세심한 배려를 하면서 사건 처리를 채제공에게

위임하였다. 그는 윤지충과 권상연을 여러 사람들이 보는 곳에서 참수에 처하고 머리를 높이

매달아놓아 모든 백성들에게 경각심을 일깨워주도록 하라고 전라감사에게 분부하였다.

 

 

              진산 성당

              80여 년 전에 지은 공소였는데, 최근에 대전교구에서 성당으로 승격(?)시키고

              상주하는 사제를 발령했다.

              현재 윤지충 바오로와 권상연 야고보를 위시한 124위 순교자와 우리나라의 두 번째

              사제인 최양업 토마스 신부님의 시복시성을 위한 일들이 진행되고 있기에, 윤지충과

              권상연이 자랐던 이곳은 성지로서 주목을 받고 있다.

 

 

우리 성당에서도 순교자 성월(9월)을 맞아 '윤지충 바오로와 권상연 야고보의 발자취'를

따라가보는 성지순례차 이곳을 방문했다.

173명의 교우들이 함께 왔기에 성당이 작은 관계로, 사진에 보는 교육관에서 미사를 봉헌했다.

 

 

                              작고 아담한 성당 내부

 

 

호남 교회사를 연구하는 김진소 신부는, 윤지충이 태어난 곳이 장구동(논산군 벌곡면 도산리

장구재 또는 장고터)이며, 그와 권상연이 자란 곳이 막현리- 두지리- 지방리 일대임을

밝혀냈다(김진소, 1998,98-99). 그리고 이들이 순교한 뒤에 윤지충의 무덤 자리가 막현리

였다는 것만 확인될 뿐 그 정확한 장소는 아직까지 알려져있지 않다.

 

 

윤지충과 권상연이 자랐고, 윤지충의 무덤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막현리 마을 입구.

 

 

               윤지충과 권상연이 자수하고 고초를 당하던 진산 동헌 자리는 진산초등학교 건물이

               세워진 곳으로 추정된다. 진산군수 신사원(申史源)은 이 동헌에서 윤지충과 권상연을

               무릎 꿇려 놓고 어머님의 위폐를 불살라버린 것이 불충불효에 해당되는지 몰랐느냐고

               다그쳤을 것이다.

 

 

               초등학교 앞에 있는 고목나무.

               아마도 이 나무는 그 무렵 진산 사건을 모두 보았을 것으로....

 

 

               두 분이 갇혀 며칠 동안 고통을 당했을 것으로 보이는, 당시의 형옥(刑獄, 감옥).

 

 

              오래된 이집은 최근까지 경로당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현재는 개인이 살고 있다. 담 넘어로 넘겨 볼 수 밖에 없는 옛날의 이 감옥이 예사롭게

              보이지 않고 서글프기만하다.

 

 

 

                     남문(풍남문) 밖 순교터 전주 전동 성당. 우리나라 순교사의 1번지이다.

 

 

진산군 관아의 감옥에서 윤지충과 권상연은 1791년 10월 29일 새벽에 작은 칼을 쓰고

전주까지 130리 길을 걸어 도착했다.

사형 판결문이 전라감영에 하달되자, 전라감사는 집행을 서둘렀다. 두 사람은 옥에서 끌려나와

형장으로 가는데 외교인과 천주교인들이 뒤따라갔다. 권상연은 모진 태형으로 몸이 허물어져

초죽음 상태로 "예수 마리아"만 부르며 걸어갔다고 한다. 윤지충은 권상연보다 몸이 튼튼하여

마치 잔치에 나가는 사람처럼 즐거운 표정으로 죽음을 향해 걸어갔다. 뿐만아니라 따라오는

사람들에게 의젓한 모습으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설교를 장엄하게 하니, 신도들 뿐 아니라

외교인들까지 모두 감탄했다고 한다.

 

 

사형장에 도착하자 영장(營將)은 두 사람에게 "서양 종교를 버리겠는가."하고 물었으나 두 사람은

한마디로 거절하였다.

윤지충은 사형 선고문을 받아 큰 소리로 당당하게 읽고나서 머리를 자르는 목침 위에 머리를

고이고는 '예수 마리아'를 여러번 부르며, 침착한 태도로 망나니에게 치라는 신호를 하였다.

권상연도 윤지충처럼 목이 잘렸다. 1791년 12월 8일(양) 오후 3시.

윤지충(바오로)의 나이는 33세였고, 권상연(야고보)은 41세였다.

 

 

한편 정조는 채제공이 상신한 대로 사형을 선고한 것을 후회하고, 사형집행을 유예시키기고

귀양을 보내도록 지시하는 파발꾼을 전라감영으로 급히 보냈으나 이미 두 사람이 순교의

영광을 얻은 후였다.

윤지충 가문의 기록에 보면, "임금은 탄식하기를 '윤고산(尹孤山· 善道)의 후손을 내 손으로

죽였구나.'"라고 했다고 한다.

두 사람의 머리는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남문에 장대 끝에 높이 매달아 놓아

천주교를 믿으면 이렇게 처참하게 참형을 받게 된다는 경각심을 주도록 했다.

그후 아흐레째 되던 날 임금은 두 순교자의 가족들에게 장례를 치를 수 있도록 허락했다.

 

 

친척과 친지들은 장례를 치르기 위해 형장에 왔다가 모두 놀라운 일을 목격했다.

처형된지  아흐레가 되었는데 시체가 상하기는커녕 바로 그날 참수를 당한 듯 선혈이

붉었다한다. 그리고 그들의 머리를 고여놓고 자른 목침에는 방금 전에 흐른 듯 선혈에

촉촉히 젖어 있었던 것이다. 이 놀라운 상황을 목격한 외교인들은 경탄하며, 재판관들의

불공정함에 항의하고 두 순교자의 무죄를 주장하였다한다. 이들 중 어떤 사람들은 이

기적에 감동하여 입교까지 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거의 죽게 된 사람이 순교자들의 피에 적신 수건을 만지고 병이 낫는 기적이 일어나기도 했다.

"순교자의 피는 신앙의 씨앗이다."라는 말은 진리였다.

윤지충과 권상연의 모범적인 순교는 초대 신도들에게 놀라운 영향을 끼치게 됬다.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건축된 전동 성당.

              서울의 명동 성당(고딕양식)과 대조를 이루며, 부드러운 곡선의 아름다움을

              조화롭게 보여주는 성당이다.

 

 

 

 

 

 

 

 

 

 

             내부도 곡선의 아름다움이 놀랍다.

 

             성당을 지을 당시, 사제관으로 지어진 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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