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글, 저런 글

용서에 대하여

권연자 세실리아 2010. 5. 19. 20:37

 

서울에서 광주에서 대구에서 부산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용서>라는 낱말을

가장 많이 사용했다고들 한다. 그 <용서>가 이 땅을 바람탄 깃발들처럼 휩쓸고 지나

갔다. 성경 구절대로 하루에 일곱 번씩 일흔 번을 용서한다 하더라도 용서는 얼마든

지 필요한 미덕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면 하루 24시간 동안 거

의 3분만에 한번씩 용서해야 되는 숫자라고 하는데 과연 누가 누구를 그렇게 용서할

수 있을 것이며 또 누가 누구에게서 그 용서를 다 받을 수 있을 만큼 뻔뻔할 수 있단

말인가.

하긴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는 아닌게 아니라 그렇게 뻔뻔한 사람도 많다. 따라서

그처럼 쓰라린 인내가 또 필요하기도 하리라. 용서란 쓰라린 인내를 필요로 하는 至

上의 미덕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그처럼 많은 용서가 필요한 사회는 결코 용서할 사회

가 못된다. 그렇게 많은 용서를 필요로 하는 역사는 자랑할 역사가 못된다. 그처럼 많

은 용서를 필요로 하는 인간관계는 용서가 오히려 악덕일 수도 있는 법이다.

그 용서는 경우에 따라 나약하고 비겁한 이들의 자기보존이나 자기 합리화를 위한 빛

깔 좋은 방패에 불과한 것일 수도 있다. 어쩌면 그것을 쓰라린 배반감이나 치열한 분

노에 대한 종교적 표현이기도 할 것이다. 이 땅에서 탄생한 103인이나 되는 천주교

성인들은 우리의 자랑이기에 앞서 우리 역사의 치부, 배반과 분노로 얼룩진 치부를

설적으로 증거하는 쓰라림 바로 그것이다.

이땅에서 자행되어 인류양심에 얼룩지는 그 치열한 분노에 대하여 교황은 아닌게 아

니라 <용서>라는 말밖에 더 이상 할말이 없었을 것이다. 분명히 나이 든 노인이면서

도 영락없이 장난꾸러기 어린 아이 같은 티없는 그 모습을 상기하면서 <용서>라는 깃

발로 감추어야 했던 그의 티없는 분노는 뜻있는 이들의 가슴가슴에 새삼스러운 충격

주었으리라. 이 땅에서 자행된 떼죽음과 우리 시대가 감당하고 있는 국제적 만행들

대하여 상당한 경종과 위안이 되었으리라. 일곱 번씩 일흔 번을 절망한 뒤에라야 비

소 다만 한번이라도 용서를 할 수 있는 것이라면 정말 용서처럼 고귀한 미덕은 없을

이다. 행여 그 고귀한 미덕을 남용하지는 말자. 그 고귀한 미덕에 마비되지는 말자.

것이 남용되어 마침내 마비되는 지경에 이르러서는 양심도 정의도 지성도 희망도,

고 우리의 가장 소중한 사랑과 신뢰까지도 마비되어 버리는 혼돈을 겪어야 한다.

노도 절망도 없어 용서를 서둘지 말자. 용서란 그것이 마지막 카드일 때에만 진실로

귀한 미덕일지도 모를 일이다.

<1984년 5월 19일>

 

鄭 洋  詩人

 

출처 : 鄭 洋  홈페이지, '에세이'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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