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는 세상

맥도널드 할머니를 만나다

권연자 세실리아 2011. 1. 28. 22:40

작년 12월 sbs ‘당신이 알고 싶은 이야기’를 통해 공개된 ‘맥도널드 할머니’가 화제였습니다.

매일 밤 패스트푸드점에 앉아 새우잠을 청하고, 아침이면 교회, 커피숍을 전전하며 한 번도

눕지 않는 생활을 반복했기 때문이었죠. 더 놀라운 점은 노숙인과 다름없는 이 노인이 외대

불문과 출신에, 20년간 외무부 직원으로 근무했던 엘리트라는 점이었습니다.

방송이 나간 직후 사람들은 그렇게 '엘리트답지 못한 노후'에 동정과 호기심을 반반씩 섞어

보냈습니다.

노인에 대한 관심이 비난으로 바뀐 건 순식간이었습니다.

지난 1월 중순 방영된 ‘맥도널드 할머니 2탄’ 속에는 노숙자나 다름없는 그녀가 스타벅스

커피를 마시고, 호텔 음식을 선호하며, 거리낌 없이 택시를 잡아타는 모습이 등장했고

사람들은 냉소를 금치 못했습니다.

여기에 엄마를 식모처럼 부렸으며 불쌍한 식구들을 쥐어짜 대학공부를 마쳤다는 식의

여동생의 인터뷰가 방송을 타면서 할머니는 과거의 영예에 매여 시궁창 같은 현실을 부정

하는 허세 가득한 ‘된장녀’가 되고 말았죠.

저도 기계적으로 마우스 휠을 내리며 '아~ 이런사람도 있구나' 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그 후로부터 정확히 일주일 후 새벽 4시.

야근을 마치고 귀가하던 저는 우연히 맥도널드 구석 테이블에 웅크린 작은 노인의 어깨를

발견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잠시 뒤 설핏 든 잠에서 깨어나 주름진 눈꺼풀을 깜빡이던

노인의 얼굴을 마주할 수 있었죠.

그렇게 대화가 시작됐던겁니다. 한시간 반쯤 얘기를 나눴던것 같은데...

아무튼 이제 'my secret'으로 일관하던 그녀의 이야기를 전해볼까 합니다.

 

먼저 방송에 나왔던 권하자 할머님이 아닌지 물었습니다 .

“맞아요. 내 얼굴이 방송이랑 똑같아요?  나는 방송이 어떻게 나갔는지 모르겠는데 사람들이

자꾸 알아보네요” 낯선 이의 접근이 싫지 않은 듯 반가운 표정이었습니다.

송 내용을 궁금해 하시는것 같아 할머니에게 스마트폰을 꺼내 기사를 보여드렸습니다.

“그러네? 내 사진이 맞네?”

인터넷에 공개된 외무부 공무원 시절의 할머니는 프릴 블라우스에 정장을 갖춰 입은 커리어

우먼이었습니다.

곧은 눈썹에 앙 다문 입술이 한 눈에도 참 고왔죠.

 

유독 정장을 좋아했다던 그녀는 화신백화점, 롯데백화점을 누비던 세련된 도시여성이었습니다.

중요한 물건이 필요하면 꼭 백화점을 찾는다고 했는데 줄곧 입고 있는 트렌치코트는 지난해 8월

신촌현대백화점에서 구입한 빈폴레이디 제품이었답니다.

제때 세탁을 하지 못해 군데군데 찌든때가 들었어도 단추며 박음질이며 디테일이 예사롭지 않았죠.

 

‘미인이셨다’는 말이 쑥스러웠는지 두 손을 모아 입을 가린 채 호호호 웃던 그녀는 27살의 저에게

궁금한 게 많았던 모양이었습니다. 어느 학교를 나왔는지, 전공으로는 어떤 공부를 했는지, 지금

하는 일이 무엇인지를 재차 물었다. 잡지사 기자라는 신분을 밝혔더니 알듯 모를 듯 옅은 미소가

번지네요.

“기자라... 참 좋은 직업이네요. 나도 한번쯤 해보고 싶었던 일이었어요. 재클린 케네디 알죠?

재클린이 워싱턴 타임즈 기자였잖아요. 그러다가 멋지고 유능한 존 케니디를 만나 사랑에 빠지지

않았겠어요.”

평생 독신이었던 그녀는 재클린과 케니디의 사랑에 로망을 품고 있는 듯 보였습니다.

아담과 이브의 선악과에 대해 이런저런 말들을 주고받던 중 왜 아직도 아담을 만나지 못했냐고 

캐물었더니 ‘딱 한번 있었다’고 하시네요.

“대학시절 동기였어요. 무척 가깝게 지냈었죠. 졸업하고 결혼하자는 막연한 약속을 하곤 했는데

느닷없이 일주일 후에 약혼을 하고 한 달 뒤에 결혼을 하자는 말을 하더라고요. 고민했어요.

하지만 우리 집안형편이 그리 좋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는 게 좋겠다고 말했어요,

그게 마지막이었어요.”

이후 더 이상의 로맨스가 없었다는 그녀. 혹시 그때 그 일을 후회하지 않느냐는 질문에는 그저

희미한 미소만 짓고 말았습니다.

 

졸업 후 외무부 직원이 된 할머니는 일본 고베영사관과 동경 대사관에서 근무했던 시절을 들려

주기도 했습니다. ‘영어는 필수’, ‘불어는 내 기반’이라는 말로 외국어 능력에 대한 자신감을

나타냈던 그녀는 “일본어는 한국어와 grammar(문법)가 같아 기초책으로 공부했다”며 “몇 달

지나서는 무리 없이 (일본어를) 구사할 수 있었다”고 전했습니다.

할머니는 요즘도 영자신문을 읽고 영어로 일기를 쓰며 일상 대화에서도 영어 단어를 섞어

쓰고는 한합니다.

가장 즐거운 일이 영문성경책을 넘기는 것일 정도로 그녀는 영어를 좋아했습니다.

혹시 외국 유학을 다녀온 게 아닌지 궁금했는데 국내에서 공부한 게 다 라고 하시네요.

어디든 꼭 들고 다니는 두 개의 쇼핑백에는 신문과 노트가 빼곡히 들어차 있었습니다.

신문 대부분은 살구 색 바탕의 문화일보였습니다. 특별히 문화일보를 고집하는 이유가 있냐고

묻자 “신문의 opinion(견해)이 내 생각과 잘 맞아서”라는 대답이 돌아오더군요.

정치, 경제, 역사, 문화 전반에 걸쳐 해박한 지식을 자랑하는 이유가 바로 신문에 있었나봅니다.

입을 헤~ 벌리고 감탄만 하고 있던 저에게 한말씀 하시더군요.

“내 지금 모습이 비록 이렇지만 끊임없이 배우고 노력하는 엘리트로서의 삶을 살고 싶어요.

나는 모름지기 사람은 죽을 때까지 공부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미스 장도 더 배우고

열심히 살길바래요.”  뜨끔했습니다.

 

  

 할머님이 늘 가지고 다니는 두개의 쇼핑백에는 신문과 노트가 빼곡하다.

 왼쪽에 놓인 선반에는 영문성경책이 보인다. 후렌치 후라이를 좋아하신다는 할머님은 이 날 두개를 드셨다고 했다.

 

그녀를 만나며 가장 의외였던 부분은 주변 고시원의 시세를 궁금해 했다는 점이었습니다.

그 곳이 ‘프라이빗한 플레이스(개인적인 공간)’냐고 몇 번이나 되묻더니 한 달 입실비가 얼마쯤

되는지, 크기는 얼만한지, 살만한 곳인지를 연달아 물어보셨죠. 이 주변에 작은 고시원이 있다는

말에 그 곳의 연락처를 적어달라며 펜과 교회헌금봉투 뒷면을 내밀던 그녀의 모습은 '어지간한

데서는 자지 않는다', '지인들이 마련한 양재동 거처를 비웃었다 등' 호화로움을 고집한다는 식의

편견과는 차이가 있어보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궁금증처럼

그녀는 어째서 부모 형제도 없이 홀연 단신으로 엄동설한의 추위를 견뎌내야 했을까요?

가족사에 대해 어렵사리 입을 열었던 그녀는 먼저 막내 동생의 방송출연 소식을 전해달라고

했습니다. 이 대목에서 저는 가장 마음이 아팠습니다.

나를 궁금해 하더냐? 동생은 어떻게 지내고 있더냐? 내내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 제 낯빛만

쳐다보고 있던 그녀에게 ‘동생분이 언니께 섭섭한 점이 조금 있는 것 같더라’는 말을 꺼내기가

참 곤욕스러웠습니다.

그다지 언니의 소식을 달가워하지 않더라는 말에 “어? 그래요? 아~” 라는 한숨과 탄식을 반복하던

그녀에게 어떤 위로의 말을 건넬 수 있었을까요.

괜한 말을 한 것 같은 저나 생각이 많아진 그녀나 둘 은 그렇게 한 동안 말이 없었습니다.

“동생이 나는 참 잘됐으면 했어요.”

무거운 침묵이 깨졌습니다.

“오빠 셋에 언니 셋, 나, 그리고 동생. 우리 형제는 총 8명이었어요. 다 사라지시고(사망) 오빠, 나,

동생 셋이 남았죠. 동생은 대학진학 대신 은행에 취직했어요. 그러다 좋은 사람을 만나 결혼했는데

내가 보기에도 아주 흡족할 정도로 괜찮은 사람이었어요. 사람들이 동생이 먼저 시집을 가는데

괜찮겠냐고 물었어도 나는 아주 좋은 마음으로 동생을 보냈어요.

시집가기 전날 저랑 나랑 붙들고 울면서 헤어졌는데 동생은 나에게 왜 그렇게 섭섭한게 많았을까요.”

스스로 집안에 대한 프라이드(자부심)가 많았다던 그녀는 부산의 유명한 비즈니스 맨(사업가)이었던

무녀독남 아버지와 집안 어른들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랐다고 했습니다.

1945년 5살이 되던 해 온가족이 서울로 올라왔다는 점으로 보아 할머니는 올해 70이 넘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할머니는 특히 큰 오빠에 대한 애정을 드러내기도 했는데요.

“우리 오빠를 나는 참 좋아했어요. 서울공대 항공조선과를 졸업해서 KAL(대한항공)에 근무할 정도로

똑똑했어요. 카터대통령한테 상도 받았던 걸로 기억해요. 새언니가 들어왔는데 오빠를 뺏겼다는

생각이 들어서 밥 먹다 말고 울면서 방으로 뛰어 들어갔던 기억도 나네요.(웃음)

새언니가 참 다정한 사람이라 ‘아가씨 아가씨’ 하며 나를 챙겨줬어요. 나중에는 우리 어머니가

새언니 흉을 봐도 내가 감싸줄 정도였으니...오빠네 식구들이 참 보고싶네요.

연락한지 10년이 훌쩍 넘었는데 살아있으면 언젠가 꼭 만나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해요”

몇 년 전 가방을 잃어버려 중요한 연락처를 몽땅 잃어버렸다고 하시네요.....

(셋째 오빠 분이던가,  정확하게 기억이 나지 않는데 어릴적부터 미술을 굉장히 잘했다.

고대 과대표를 지냈다.

엄청나게 똑똑했다는 말씀을 자꾸 하셨습니다. 모르긴해도 형제분들이 다들 영리했던 모양이에요.)

 

77세에 돌아가신 어머니가 가장 그립다고 말하던 그녀는 어머니를 대신해 나를 구원해 줄 사람을

기다린다며 제 손을 꼭 잡았습니다.

“나에 대해 궁금한 점이 더 많겠죠? 그러나 내가 타인을 평가하지 않듯, 타인도 나에 대해

불필요한 평가를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내 삶의 방식, 내 삶의 태도를 나는 존중해요.

인생을 살아갈 이유는 남이 아니라 내가 정하는 거니까. 오늘 누군가 약속을 지키지 않아 무척

마음상하는 일이 있었는데 이상하게 너무 피곤하네요. 너무 미안합니다. 더 말해주고 싶은데

내가 기력이 없어서. 나는 항상 이 자리에 있을 테니 언제든 또 만납시다.

잘 들어가요 미스 장 고맙습니다.”

 

 그럴듯한 ‘척’과 몸에 베인 ‘습관’은 분명 다르겠지요.

제 생각에 그녀의 하루는 누르면 푹 꺼지고 말 빈껍데기 허세(虛勢)가 아니라 십 수 년을

이어온 삶의 방식이었습니다.. 기둥을 허물어 새집을 짓는게 어디 그리 쉬웠을까요.

할머니의 삶에 잣대를 들이밀어 옳고 그름을 판단할 권리가 누구인들 있을까? 싶었습니다. 

그 새벽, 제가 마주했던 건 허세에 찌든 노숙자도, 실패한 엘리트도 아니었습니다.

삶의 일관성을 포기할 수 없었던 노파의 희미한 몸짓이었다고 하면 맞을까요......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그날 새벽 저는 오래 이 말을 곱씹어 보았습니다.

 

원문 : 장혜정 blog.chosun.com/sesjung4652

출처 : 조선닷컴 와플라이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