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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문의 은빛 여우… 홀린 듯 -27도 섬으로 갔다

권연자 세실리아 2021. 8. 5. 15:26

다시 공항을 갈 수 있다면, 당신은 어딜 찾고 싶은가.

새로운 여행도 좋겠지만, 한 번은 꼭 다시 가고 싶은 곳이라면.

코로나가 끝나면 다시 찾고 싶은 그곳. 염천 더위에 대신 떠나는 지상(紙上) 여름휴가.

 

 

                     지난겨울 눈에 덮인 블라디보스토크.

                     루스키섬의 최남단에 있는 토비지나곶으로 가는 숲길도 이와 같았다.

                     은빛 여우는 이 순백의 어딘가에서 몸을 숨기고 있으리라.

                     다시 찾으면, 그때는 꼭 만날 수 있겠지. /AP 연합뉴스                     

 

 

 

코로나가 시작되기 전 겨울, 나는 블라디보스토크로 떠났다.

신작 취재차 편집자와 함께 떠난 여행이었다.

그곳에서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바이칼호수로 갈 예정이었다.

그때만 해도 시베리아는 낭만과 상상의 땅이었다.

광활한 설원과 자작나무 숲과 썰매 개들이 질주하는 겨울왕국.

 

낭만은 무슨… 극동의 유럽이라는 이 항구 도시는 충격적으로 추웠다.

어두운 거리로 눈보라가 몰아치고, 바람이 전차처럼 몸을 들이받았다.

정신이 알딸딸해지고 눈물이 핑 돌았다. 눈물은 고드름이 돼서 속눈썹에 맺혔다.

전광판 온도계는 영하 27도를 가리켰다.

우리는 핸드폰으로 바이칼호수의 기온을 검색해봤다. 영하 41도. 살 떨리는 숫자였다.

 

이튿날, 호텔 로비에서 젊은 한국인을 만났다.

그녀는 블라디보스토크 남부 루스키섬에 가보라 말했다.

북한 지형을 닮아 ‘북한섬’이라 불린다는 토비지나곶의 십자가 언덕까지 쭉.

덤으로 신비로운 이야기를 들려줬다.

 

              토비지나곶 해안길에서. 생애 첫 유빙(流氷)을 만난 순간의 전율이 지금도 생생하다. /소설가 정유정 제공

 

“그 섬에 은빛 여우가 있어요.”

 

여우는 눈 쌓인 숲길에서 그녀를 바라봤다. 그녀도 숨을 멈추고 녀석의 금빛 눈을 바라봤다.

녀석이 몸을 돌려 사라질 때까지, 홀린 듯이. 꿈을 꾼 기분이었노라 했다.

추위 따윈 잊고 꿈길을 걷듯 눈바람 속을 걸어왔노라, 했다.

 

잠시 후, 우리는 택시를 타고 루스키섬으로 가고 있었다.

여우를 만나고 싶어서. 여우에게 홀리고 싶어서. 눈바람 속을 꿈길처럼 걷고 싶어서.

그러면 ‘영하 41도’에도 기죽지 않을 것 같아서.

기차 시간까지 한나절 남았으니 홀릴 시간도 충분했다.

 

택시는 토비지나곶으로 가는 숲길에서 멈췄다. 눈이 쌓여 더 갈 수 없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준비해온 아이젠을 부츠에 끼우고 걷기 시작했다.

북한섬이 건너다보이는 비탈에 도착했을 때, 하늘이 돌연 어두워졌다.

수평선에선 납빛 구름이 몰려오고 있었다. 곧 눈보라가 몰려올 날씨였다.

 

                                                       루스키 섬, 블라디보스토크

 

돌아갈까, 내처 갈까. 갈등은 길지 않았다.

섬 사이의 바다는 얼어붙었고, 눈 덮인 수면 위엔 둥근 발자국이 찍혀 있었다.

섬으로 향하는 발자국이었다. 아무래도 여우의 발자국 같았다. 우리는 바다를 건너갔다.

암벽 비탈에 박힌 밧줄을 잡고 섬으로 상륙했다. 발자국을 따라 나뒹굴듯 눈길을 내달렸다.

십자가 언덕에 도착한 건, 눈보라가 막 시작됐을 때였다.

거대한 십자가 밑에는 무언가가 있었다. 야성적인 푸른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는 무언가가.

턱 끝에 찬 숨을 가누며, 우리는 무언가를 마주 봤다. 뾰족하게 선 귀, 은회색 털, 큰 덩치와 긴 다리.

편집자는 혼란스러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저게 여우라고….

 

십자가 뒤편에서 백인 남자가 나타났다.

그는 여우인지 개인지에게 뭐라 소리치며 언덕을 달려 내려갔다. 녀석은 총알처럼 튀어 나갔다.

혼란이 딱 정리되는 순간이었다. 그들은 운동하러 나온 개와 집사 커플이었다.

 

우리는 끝내 여우를 만나지 못했다. 눈보라에 휩싸인 섬을 빠져나오며 다음을 기약했을 뿐.

다시 와야지. 그러니까 소설만 끝내면 곧바로.

 

소설을 끝낸 지금, 세상의 문은 닫혀버렸다.

나는 비행기 대신 꿈길을 타고 그 섬에 간다. 눈보라 치는 십자가 언덕에는 나를 기다리는 여우가 있다.

녀석은 신비로운 금빛 눈으로 말을 걸어온다. 잘 봐봐, 내 눈은 하나도 개 같지 않아.

 

 

 

 

[코로나 끝나면… 기다려, 곧 만나] 씨리즈

소설가 정유정

▶정유정 : 인간 본성의 어두운 면을 집요하게 탐구하는 소설들로 ‘스릴러의 여왕’이란 별명이 붙었다.

작품을 탈고할 때마다 히말라야나 제주도로 훌쩍 떠나 걷고 또 걸으며 비뚤린 정신과 몸을 다잡는다.

저서로 ‘7년의 밤’ ‘완전한 행복’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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