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는 세상

북한 수용소에서 귀환한 독일 수녀(1)

권연자 세실리아 2010. 10. 29. 22:29

 

북 수용소에서 귀환한 
마지막 생존 독일 수녀 -제1편- 

 

-대구 베네딕토 수녀원 벨트비나 수녀님

 

 

며칠 전 대구 포교 베네딕토 수녀원을 방문했다. 꼭 뵐 분이 있었다.

96세의 독일 벨트비나 수녀님이시다. 한국명 채 인숙.

 


만포진 남쪽 강계 산골에 북한이 설치된 비밀 강제 노동 수용소에서
지옥같은 세월을

가까스로 살아남아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 성직자 중에 유일하게 생존하신 분이다.

 


이 옥사독이라는 강제 노동 수용소에 1949년 함경도 일대에서 강제 체포해온 독일인

남녀 성직자 59명이 수용되어 인간으로서 형언할 수없는 고통의 강제 노동을 5년

가까이 겪었다.

 


그중 신부, 수사 15명과 수녀 2 명이 사망하여 그 곳 외딴 수용소 언덕에 묻히는

비극을 당했었다.

 


그러나 기적적으로 살아 남아서 독일로 송환 된 수녀와 수사, 신부님들은 망가진

몸을 고국에서 추스른 뒤 다수가 다시 한국으로 돌아 와서 전쟁의 폐허 속에 산산이
부서진 한국인들의 심신을 가슴으로 안고 어우르며
일생을 봉사하였다.


벹트비나 수녀님은 그 중에서 생존해 계신 마지막 수녀다.

[평양 교화소에서 전원 숨진 8명을 합치면 67명의 독일 성직자 중 벨트비나 수녀님만

생존해있다.]

 

보행이 다소 불편하고 귀도 어둡지만 독일 할머니는 정정하시다.


그 분은 아직도 소녀 같은 장난끼가 있는 말로 이렇게 말했다.

“ 다 갔어-! 나 하나 남았어-!”

 

그 밝은 표정은 벨트비나 수녀님을 생지옥이라는 단어가 무색한 옥사독의 강제 노동

수용소의 고통을 겪고 돌아오신 분이라고 믿기가 어렵게 만들었다.

 


벨트비나 수녀는 1914년 생으로 독일 슈바인푸르트 인근에서
태어났다.

 


1937년 독일 투찡에 있는 베네딕토 수녀원에 입문해서
성직자들의 길을 걸었다.


이모도 수녀로서 일생을 보냈고 언니는 같은 베네딕토 수녀원 소속으로 마닐라에서

사목하다가 그 곳에서 일생을 마쳤다.


수녀님은 어떻게 해서 한국에 오게 되었는지를 말해주었다.


잘 몰랐던 사실로서 벨트비나 수녀가 입회 할 당시 히틀러가 천주교를 탄압하는

정책을 취했었다고 한다.

 


그래서 베네딕토 수녀원의 투찡 모원(母院)에서 앞으로 수녀원의 앞날이 어떻게

될지 모른다고 걱정하여 아직 종신서원을 받지 못한 청원자들중에 해외 포교를

원하는 수녀들을 서둘러 해외 파견을 했는데 벨트비나 수녀님도 원산으로 와서

종신서원을 했다,

(종신 서원은 수녀가 일신을 하느님께 바치겠다는 의식으로서
 
이 의식을 거친 뒤 정식 수녀가 된다.)

 


어떻게 해서 한국 전쟁과 아무 연관이 없는 게르만 민족의 성직자들이
외부 세계와

차단 된 강제 노동 수용소에서 5년 가까운 세월을 보내야 했던가?

 


북한의 공산 집단이 조선인들의 정신을 오염시킨 잘못 된 사상을 주입시켰다는 이유로

산골에 가두어 두고 죽음의 강제 노동을 5년간이나 시켰기 때문이다.


동족상쟁이라는 6.25 전쟁을 도발한 북한 집단은 정말 그 잔인성에서 이해가 가지 않은

짓들을 해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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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트비나 수녀님은 고령에다가 귀가 어두워서 긴 대화를
가질 수가 없었다

 

여기서부터 대구 베네딕토 포교 수녀원의 베로니카 이 정순 수녀님이 1989년에 펴낸

'원산 수녀원사'를 참고한다.
아울러서 베로니카 수녀님이 제공한 겔투르드 링크 수녀님의 자서전도 참조하였다.

 
벹트비나 수녀님은 한국어가 유창해서 북에서 감시원들과 억류 독일 성직자들의

통역을 맡아 했었다.
베로니카 수녀의 '원산 수녀원사' 집필시 독일 자료의 번역에
큰 도움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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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편을 잡다가 성직에 입문한 베로니가 이 정순 수녀님은 미국 유학도 갔다 오고

서울에 베네딕토 수녀원이 설립한 농아 교육원‘애화학교’의 교장을 7년간 역임하였다.

 


베로니카 수녀가 방대한 자료와 수많은 증언을 수집하고 집필해서
1989년 펴낸 이

'원산 수녀원사’는 김 수환 추기경이 발간사를 썼다.

 


내 생각에 이 정도로 방대한 자료를 치밀하고 체계있게 정리해서 담은
종교 역사서는

한국에서 좀처럼 찾아보기가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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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년 독일 성 오티리엔 수도원에서 파견한 성직자들은 함경남도의 덕원에 한국의

수도원을 열어 10년 만에 놀랄만큼 훌륭히 키웠다.

 

신학교,성당, 농장, 학교, 인쇄소, 포도주, 주조장[세례용]등이 이 덕원 수도원에서

바삐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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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는 원산 출신 카타리나 할머니라는 분이 계시다. 독실한 천주교 신자이시다.
처녀 시절 덕원 수도원에 가보신 카타리나 할머니는 이 수도원이
유럽의 오래 된

성에 온 것 같은 느낌이들만큼 시설이 좋았다고 회고했었다.

성 오티리엔 성직자들이 조선 파견 10년 만에 이룬 결실이었다.
이곳은 현재 북한의 농과 대학이 들어서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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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원이 급성장하자 덕원 수도원의 샤우어 주교는 독일에서 자매 관계인 투찡의

베네딕토 수녀원에 수녀 파견을 요청했다. 수녀 청원자들이 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직 젊었던 투찡 모원[母院]은 해외에 포교 수녀를 파견할 여력이 없었다.
네 명 파견의 여비가 없어서 4년을 보낸 끝에 겨우 여비가 마련되자 
해외 선교

희망자를 선발하고 그 중 네 명의 수녀를 먼 극동의 식민지였던 조선에 파견했다.


1925년이었다.

 

여객선을 타고 먼 바다를 항해해서 이국 조선에 온 네 명의 수녀들은 원산의

소박한 민간 가옥에서 포교의 첫 발을 내디디었다.

수녀원도 수도원같이 빠르게 성장하여 함경남북도 여러 곳에
분원도 열고 원산

수녀원에 해성 학교와 호수 천신학교도 문을 열었다.


벨트비나 수녀는 원산 수녀원이 함흥에 문을 연 작은 분원의 분원장을 했었다.

 


수녀원이 산산조각이 나던 1949년에는 1937년에 원산에 온
겔투르트 링크 수녀가

원장으로 임명되었다.

[이 겔투르드 수녀는 운명에 따라 지옥의 수용소에서 수녀들을 이끌고 감싸고

돕는 대표가 된다.]


전쟁이 끝나고 소련군이 진주하자 일제하에서도
없던 만행이 시작되었다.


여러 시설이 강제 징발로 빼앗겼다.

그들은 함흥 수도원을 접수하고 그들의 숙소로 사용했다가 교황청의 개입으로

다시 내주었다. 그 뿐만 아니라 독일과 조선 수녀들은 난행을 일삼는 소련병사들을

피해 다녀야 했다.
 

소련군은 1948년 11월 철수하였다.

 


그러나 재난의 비극은 다음 해에 몰아 닥쳤다.
1949년 5월 9일 밤.

함경남도 보위부장 김 석형의 지휘로 함경남북도 일대 전 수도원과 수녀원이

일제히 습격 받아 체포와 구금의 선풍이 불었다.

모든 종교인은 종교 시설에서 추방되었다. 그리고 전 시설이 폐쇄되고 압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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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김석형이라는 인간에 대해서는 울프 독의 블로그에서 소개했었다.

이 자는 1960년 남파 간첩이 되어 서울로 침투했다가 체포되어서 30년 넘는

수형생활을 하다가 석방되어 북한으로 돌아갔다.

 

 

 북으로 간 노간첩 이야기 
김 석형이 산산조각을 낸 덕원수도원과 원산 수녀원이
남한으로 피난 와서

재건한 왜관 베네딕토 수도원과 대구 포교 베네딕토 수녀원이 있는 대구 소재
교도소에서 10년간을 복역했는데 대구 지역 성직자들은 이를 몰랐었다.

수도원과 수녀원을 페쇄시키고 성직자들을 죽음의 길로 내 몬 함남 보위 부장 김 석형.

남파 간첩으로 30년 복역 후 석방되고 8년 뒤 북으로 보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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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성직자는 추방되었고 독일 성직자는 모두 교화소에 수감되었댜.

 


독일 수녀들은 함흥 원산 평양등의 교화소에 수감 되었고 샤우어 대주교와 신부들은

평양의 형무소로 끌려갔다.

 


여기에 함흥 분원장이었던 벨트비나 수녀님이 끌려갔던
함흥 교화소의 모습을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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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분원의 다른 세 명의 독일인 수녀들과 함께 끌려갔다. 보위부는 매일 한 명씩

불러내서 수녀원 지하에 무전기를 설치하고 바티칸과 비밀교신을 하며 간첩 질을

하지 않았냐는 혐의로 거친 심문을 받았다.

 


감방의 넓이는 1m 세로 3m 정도였다.
죄수들이 먹는 음식은 참으로 기가 막혔다.
여러 가지 잡곡을 섞어 만든 밥 덩어리와 국이라고는 소금물에 가끔 배추 잎이
떠 있는 정도였다.

 


약 두 달간 이 함흥 교화소에 있는 동안에 고기라고는 단 두 번 생선을 먹은 것

뿐이었다.


걸레는 너무 닳고 더러워서 걸레질도 잘 되지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이 벼룩

빈대등이 감방을 가득 살고 있었고 입감할 때 나누어 준 이불에도 벼룩이

득시글거렸다.


벼게는 베고 자기 힘든 목침이었다.

 

방 한구석의 변기는 코를 찌르는 악취를 풍기고 있었다. 분뇨가 가득차면 2주에

한번 씩 건물 밖 큰 분뇨 통에 버렸는데 벨트비나 수녀는 오히려 이 시간이

기다려졌다. 왜나하면 바깥의 맑은 공기를 마실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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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트비나 수녀는 50여일간의 함흥 교화소 수형 생활을 하고 다시 평양으로 이송되었다.

평양에는 60여 명의 독일인 성직자들이 다 모였다. 이들의 처분 방침이 서서 평양에

집결시킨듯했다.

재판이 열렸다.

 

그들이 범죄인으로 선고한 8명의 독일인 성직자와 6명의 조선인 신부들은 그대로 평양

교화소에서 복역하도록 억류 되었다.

 

그 죄목이라는 것이 기가 막힌 것이었다. 엄 다고베르트 엔크 신부는 밀주를
제조했다고 해서 범죄자로 분류되었다.[5년형]

-성당에서 전례용으로 쓰는 포도주를 밀주로 보았으니 세계가 놀랄 일이다-

 

운전기사를 했던 그레고르 수사는 체포 압송될 때 금지된 카메라를 소지했다고 유죄를

인정받았다.[5년형]

 

덕원 신학교 루퍼트 교수 신부는 [사후 영의 불멸설]이라는 교재를 집필했는데 이것이

공산주의를 경멸했다고 유죄를 선고 받았다.[5년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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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 블로그에 소개했던 함남 보위부장 김 석형이 함경도 일대 천주교의 뿌리를

뽑아 버릴 때 라틴어로 쓰여진 위의 서적을 탄압의 핑계로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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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형의 중형을 받았던 샤우어 대주교는 천식으로 고생하다가 1949년 2월 평양

교화소에서 숨을 거두었다.

5년형의 신학교 교수 루퍼트 신부도 이어서 선종[천주교에서 말하는 사망]했다.

 

다행이 그들의 유해는 북진한 유엔군을 따라서 평양에 들어갔던 인사들에 의해서

남으로 운구 되었다.


다른 6명의 독일인 신부와 수사들은 모두 지금까지도 생사에 관한
어떤 정보도 없다.
단지 UN군 북진 때 북한 공산당에 모두 처형당했으리라는
추측만 하고 있을 뿐이다.

 


무죄로 판결된 성직자들은 석방 된 것이 아니었다.

신부들과 수사들, 그리고 수녀들은 교화소장으로부터 지방의 노동
수용소로 잠시

이동해야하고 이 수용소는 경치가 매우 좋은 곳에 있다는 감언이설을 들었다.

 

순진한 독일 성직자들은 그 말을 믿었었다.
이제 덕원 수도원처럼 경치 좋은 곳에서 살 수가 있다고 한 말은 이들에게 어떤

희망을 느끼게 했다.

 


1949년 8월 5일 밤 독일 성직자들 평양역서 야간열차를 타고
미지의 곳으로 출발했다.


8월 6일 기차역도 아닌 곳에서 내려라하는 지시가 있었다.
일행은 다시 트럭으로 이동하였다. 평안북도 강계군 전천면 별하리라고 하는 곳이었다.

 



독일 가족들이 내 몰린 강계군 전천면 별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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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은 산길 밑에서 내린 가족들은 걸어서 올라가야 했다.
산으로 오르는 길은

너무 가팔라 수레가 올라가지 못하고 소가 끄는 썰매가 사용되었다.

[이 썰매도 나중에 성직자들이 다 만들어야했다.]

 

마지막으로 도착한곳은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이고 높은 분지에 있는 마을 이었다.


산골 주민들은 한 명도  안 보이고 10여 채의 빈 가옥만 있을 따름이었다.
이들 산골 주민들은 모두 추방당하고 몇 채의 집은 감시원들이 사용했다.

여기에 끌려온 독일인 수도가족은 신부 17명, 수사 22명, 수녀 20 합계 59명이었다.

[정확히 말한다면 이중에 임마쿨라타 수녀는 독 불 혼혈아로서 국적은

프랑스였지만 독일인으로 살았었다.]

4년 뒤 이들 중에 42명만 살아 독일로 돌아왔다.

 


독일 성직자들은 자신들이 끌려온 그 곳이 어느 곳인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수도원 가족들은 쫓겨난 주민들이 버리고 간 쓰레기 더미에서 반쯤 찢어진 편지

봉투가 발견되었다.

 


한자를 아는 신부들이 한자로 써진 그 봉투 겉면 주소에서 구슬 옥[玉]자와 모래

사(沙)자를 구별해서 읽을 수가 있었다.

 


두 글자를 합쳐서 자신들이 끌려온 지명 불명의 계곡을 '옥과 모래의 언덕'이라고

부르기로 했던 옥사덕이 나중에 옥사독으로 변화 된 명칭으로 고착되었다.

 


평양 교화소는 이미 두 달 전 수감중인 에우제비오 로마이어 수사를 호출해서 60명

정도가 살 집을 설계 하게한 후 여러 수사들을 이곳으로 파견해서 집 짓는 강

노동을 시켰다.

 


수사들이 6월 25일 도착해서 화전민 외양칸을 개조한 숙사에서 먹고 자며 수도원

가족과 수녀원 가족들을 위해서 긴 집을 지었다.

오랜 교화소 생활과 강제 노동에 선발대중 1명의 수사가 버티지 못하고 본대가

도착하기 전 이미 저 세상으로 떠나고 말았다.

 

원본 : '울프 독'님의 불로그(스크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