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는 세상

북한 수용소에서 귀환한 독일 수녀(3)

권연자 세실리아 2010. 11. 1. 14:53

 

북 수용소 귀환 
마지막 생존 독일 수녀
-제3편-

이 산골에서 숨을 거둔 두 분의 수녀들의 임종 이야기는 특기 할만하다.


먼저 세상을 뜬 수녀는 원산 수녀원 부원장이었고 시게벨타 수녀님처럼 양재 솜씨가

좋았던 에와 수녀(1899년생)였다.

 

강제 노동 수용소에 끌려오기 전 그 녀는 소련군 장교 부인들의 옷을 멋있게 만들어서

소련군의 탄압으로 옹색해진 수녀원 살림에 보탬이 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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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와 수녀는 원래 심장이 좋지 않아
옥사독 산골로 끌려올 때 걷지를 못해 소를

타고 올라왔었다. 강심제로 버티며 바느질 방에서 돕고 있었지만 1949년 성탄 때

부터 병석에 누워 일어나지를 못했다.


심장이 쇠약한 터에 갑자기 심한 부종(浮腫)이
왔다.

 

(이 병-浮腫-을 옥사독의 여러 식구들이 앓다가 죽었다.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 옥수수만 먹이는 북한의 강제 노동소에서
많이 발생한다는 펠라그라 병과 비슷한 것이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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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병석이지 침대도 없고 침구도 베게도 없으며 가마니를 깐 맨 바닥이었다.

 

살아 남기위한 그 녀의 몸부림은 보기에도 안스러움 그 자체였다. 그 녀는 병든

몸을 이끌고 냇가에 나가 물에 몸을 담그는 물 치료법도 해보고 이 약초 저 약초

써서 치료도 해보았다. 효과는 조금도 없었다.

 


다리가 퉁퉁 붓자 그 녀는 산죽 가지로 찔러서 물을 뽑았는데 물은 일주일 동안

계속 흘러나왔고 일 주일 뒤 2차 감염까지 와서 1950년 8월 10일 저 세상으로 갔다.

 


그 녀는 최후를 예감한 날, 원산 수도원장 겔투르드 수녀를 불러 자기 옆을 떠나지

말라고 애원하고 가냘픈 숨을 쉬다가 몇 시간 후에 눈을 반쯤 뜬 채 숨을 거두었다.

 



프룩투오사 게르스트 마이어 수녀(1888년생)는 원산 수녀원이 빈민층을 위해서

열었던 시약소의 소장이었다.

 


간단한 진료도 할 수 있었던 이 시약소는
수없는 서민들을 질병에서 구했었다.

사실 지금 대구의 대형 파티마 병원은 이 시약소가 모체라고 할 수 있으며 좀 넘어서

말하자면 그 녀는 대구 파티마 병원의 초기 원장이라 할 수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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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 원산에 사시던 카타리나 할머니는
이 시약소가 수녀원이 세운 해성학교 앞에 있었으며
원산 시민들에게 수녀 병원으로 잘 알려져서 손님들이
많았다고 하였다.

 


카타리나 할머니는 이곳에 가끔 가보았는데 발끝까지 오는 길고
하얀 수녀 복을 입고 허리춤에 긴 묵주를 찬 독일 수녀
여러 명이 바삐 일하는 모습을 본 기억이 난다고 했다.

이 중에 한 명이 프룩투오사 수녀님이었으리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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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녀는 함경남북도 일대의 한국인들에게 가장 많이 알려졌었고 의사 수녀님이라는

애칭으로 불리던 인기 있었던 수녀였다.

 


1951년 8월 가벼운 뇌졸중을 일으켜 종부 성사를 받고 난 다음 좀 회복의 단계로 들어

갔기에 바느질 방의 보조 소임을 하다가 1952년 9월 15일 밤에 잠자듯 저세상으로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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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살이는 이렇게 중노동으로 죽어가는 옥사독 독일인 성직자들이
선종할 때마다

"쓸모없는 사람은 빨리 죽어 버려야한다!"라는 비인간적인 냉혹함을 내뱉곤 했다.
사망한 시신을 함부로 넘어 다니는 몰상식한 감시원도 있었다.

 


북한 사람들은 수용소 근처에 얼씬도 안 해서 독일인 식구들은 도통 바깥 세상이

돌아가는 것을 알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1953년 5월 악마 같은 정 소장이 이임하고 김 소장이라는 사람이 새로

부임했다.

 

그는 매우 인간적이었다.
옥사독 가족들에게 함부로 대하지도 않았고 마구 내몰아 일을 시키지도 않았다.

 


감시원들에게도 연장자들에게 예의를 지키라고 지시하기도 했다. 수녀들은 3년 반이

넘는 잔악한 대우만 받다가 인간적인 취급을 하는 그가 고마워서 예쁜 털장갑을

떠서 선사했다.

 


그러나 옥사독 식구들은 그가 원래 살살이와 달리 품성이 착하기도했지만 이미 독일

억류자들에게 잘 대하라는 상부의 지령이 내려 간 것은 몰랐었다.

 

보급도 갑자기 좋아지기 시작했다.

 

8월이 되자 하루가 멀다하고 상공을 휘젓던 미 전투기들도 나타나지를 않았다.


늦게까지 일을 할 때 산 고개에서 멀리 내려다보이는 마을에 전깃불이 반짝이는 것을

보기도 했다. 등화관제가 해제 되었다는 뜻이다.


뭔가 변화가 오고 있는 것 같았다.
9월 어느 날 감시원에게 부탁했던 곡식 종자가 봉투째 배달되었다.
종자 봉투는 중국 신문으로 만든 것이었다.


한문을 아는 한 수도원 식구가 이를 읽고 이 중국 신문이 전쟁이 이미 끝났다는

사실과 포로교환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뉴스를 전하고 있다고 말했다.
옥사독 식구들은 희망을 갖기 시작했다.

 


드디어 1953년 11월 15일 옥사독의 독일인 식구는 전부 본국 귀환을 통보 받고 사흘

뒤인 11월 18일 옥사독을 떠났다.

 


수녀원장 겔투르드 수녀는 자신들이 목숨을 던지는 전력을 다해 가꾸어 놓아 이제는

풍요의 골짜기가 된 옥사독을 떠나는 아쉬움을 그녀의 자서전에서 짧게 언급했다.

 


성직자들은 순안의 한 초대소로 옮겨 대우를 잘 받고 영양을 공급하여 모두 보기

좋게 살이 오르자 1954년 1월 7일 기차로 북한을 떠났다.

" 지금까지의 여기서 겪은 고생에 대한 섭섭함을 잊으시고
  앞으로 조선 독일 민족의 친선을 위해서 노력해주시오."

그가 살살이가 그 긴 세월 어떤 잔인한 학대를 했는지 알았더라면 그런 뻔뻔한

소리는 얼굴이 붉어져서도 못했으리라.


그들은 긴 여행끝에 만주와 소련을 지나 동독에 도착하였다. 동독에서 버스로 바꿔

타고 1월 22일 저녁 드디어 서독의 헬레스하우센에 도착했었다.

수 많은 인파가 몰려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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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간 모국 서독에서는 난리가 났었다.
1949년 수도원과 수녀원을 폐쇄 당하고 모처로 끌려간 뒤 소식이 두절 되었던 남녀

성직자들이 5년 만에 마치 지옥에서 돌아오듯 갑짜기 나타났으니 전 국민이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들이 귀환한다는 뉴스가 라디오로 전해지자 전 국민들은
들끓듯 흥분했다.

수많은 군중들이 운집해서 테데움[Te-Deum: 감사가]를 부르며 환영했다.

 


슬픔도 뒤따랐다.
북한 땅에서 숨진 남녀 성직자들의 가족들이 이들이 생환했으리라고 반겨 달려왔다가

북한 땅에 잠들어 있다는 말을 듣고 눈물을 삼키며 돌아가는 모습은 귀환자들을
숙연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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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당의 탄압을 받고 해산한 뒤 원산 수녀원에서
뿔뿔이 흩어진 한국인 수녀들의

이야기도 빼놓을 수가 없을 듯하다.

 


모든 독일 성직자들이 붙잡혀 가고 수도원과 수녀원, 그리고 각 분원들은 모두 폐쇄

되고 한국인 수도원과 수녀원 가족들도 교화소에 끌려가 고생을 하다가 몇 주 뒤

석방되었다.

 


공산당들은 이들을 석방하면서 마치 서양 귀신에게 홀려서 미쳐 있는 사람들을 구제

해준 듯이 생색을 냈다고 했다.

 


북한에서 갈 곳없이 방황하던 수녀들은 각기 혈혈단신으로 월남을 했다.
이들은 갖은 고초를 겪으면서도 부산 중앙 성당으로 집결하였다.
여기에 집결한 수녀들은 17명, 덕원 수도원 신부와 수사는 16명이었다.


부산 중앙 성당은 함경도에서 피난온 수 백 명의 카톨릭 신도들이 신세를 지고

있었기에 피난 성직자들의 잠자리는 있었으나 살길을 찾아야 했다.

 


박 골롬바 원산 수녀원 부원장이 구심점이 된 이들은 살길을 찾아 수예품도 팔고

미군 부대 빨래도 했고 국군 병원의 환자 도우미등을 하며 살길을 개척하려 몸부림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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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을 향한 몸부림은 최 덕홍 주교의 배려로 대구 주교관으로 이동을
하고 나서도

당분간 계속 되었다.

 


박 골롬바 수녀는 모시를 사다가 모시 적삼을 만들어 팔기도 했지만 재미를 보지

못했었고 면사포나 수예품을 만들어 팔았다.


미군의 머피 신부, 맥카티 신부들의 큰 도움이 있었으나 근본적인 문제의 해결은

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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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녀들이 삶을 위한 투쟁을 하고 있을때 한국 수녀들이 월남했다는 소식에 접한

독일 투찡 모원은 스위스에서 분원장을 하던 오트라마 수녀를 전쟁중의 한국으로

급파했다.

 


오트라마 수녀는 1928년에 원산에 파견되어 6년간 사목한 바 있어서 한국어도 할

줄 알았고 한국 사정에도 밝았다.

 

급파 명령을 받은 그녀는 1951년 1월 일본까지 왔으나 그 녀가 중립국 소속이라는

이유로 한국 정부가 비자를 내주지 않아 일본에서 5개월을 대기하다가 겨우 비자를

얻어 한국으로 들어 올 수가 있었다.

 


그 녀가 오고 동시에 수사들과 수녀들은 대구 최 덕홍 주교의 초청으로 부산을 떠나

대구로 옮겨 가게 되면서 이곳에 대구 베네딕토 수녀원이 자리 잡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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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곳에서 놀랄일이 생겼다.

북한에서 행방불명되었던 원산 수녀원 김 로사수녀가 황해도에 은신해 있다가

1952년 7월 10일 전선을 뚫고 강화도와 소사를 거쳐 대구까지 찾아왔던 것이다.

 


오트라마 수녀는 쉬지 않고 독일과 모국에 편지를 보내서 모금을 했다.

첫 결실로 1,700불을 모금해서 100평짜리 일본식 집을 사서 비로소 원산 수녀원

수녀들은 유랑시대를 마감하고 자기 집을 마련할 수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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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부문화가 강조되는 오늘 날 한국 사회에서 이 암흑 시절
독일의 신도들이 한국에 보내온 막대한 기부의 성의에
배울 바 크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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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베네딕토 수녀원이 설립되고 빠르게 불어난 교세와 함께 수녀원은 큰 성장을

하게 되었다.

 

여기서 베네딕토 수녀원 보다 더 일반에게 잘 알려진 파티마 병원 탄생의 역사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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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딕토 수녀원이 형편이 피면서 과수원을 사서
두 번째 수녀원을 지어
이사했을 때 수녀원 한 쪽에
자그마하게 시약소를 열었다.


이를 안토니오 의원이라고 이름 짓고 환자들을 돌봤다.
옵트마라 수녀는 약사 자격증이 있었고 원산에서
프룩투오사 수녀와 같이 환자들을 돌본 경험이 있어서
간단한 진단 치료는 의사 수준의 기술이 있었다.

 


북한에서 사망한 프룩투오사 수녀가 운영하던 시약소에
손님이 많았었고 전도의 성과도 컸던 것에 착안 한듯하지만

초기에는 원체가 가난한 수녀원 형편에 약간의 수익이
발생하면 그것이 다소 생활에 도움이 될듯했던 것이다.

 


역시 이 시약소는 대구 지역의 서민 천주교 신도들에게
먼저 소문이 나서 손님들이 많이 왔다.

밀려드는 환자들을 약국으로서 감당할 수가 없어
수녀원은 독일에 의사 수녀의 파견을 의뢰했다.

 


마침 새로 구입한 대지에 대구의 미군들이
작은 병원을 지어 주었다.

의대를 졸업한 마리아 살루스 수녀가 한국으로 달려왔다.
마리아 살루스 수녀는 한국의 의사 고시를 보아서 합격하고
본격적인
의료 사업에 나섰다.

 


파티마는 수녀원의 본당인 대구 신암동 성당에 종각위에
설치한
파티마의 성모상에서 작명 된 것이다.

 

정식으로 ‘파티마 의원’은 놀라운 성장을 계속해서
오늘날 대구의 병상 800 석의 대형 종합 병원이 되었고
창원에도 그 절반 규모의 종합 병원이 있다.

(북한의 옥사독  찬 땅속에 누워있는 프록투오사 수녀의
 
영혼이 알았다면 크게 기뻐하고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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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딕토 수녀원이 재난에서 벗어나 조금씩 궤도에 접어들자 옵트라마 수녀와 역시

북한에서 탈출해온 수녀들은 독일 투찡의 모원에 북한에서 큰 고초를 겪고 돌아온

독일 수녀들을 다시 한국에서 잘 모시겠다고 재 파견을 요청했다.

 


모원(母院)은 냉담했다.

 

그 생각하기도 으스스한 곳에서 겨우 살아 돌아온 수녀들을 다시 보낸다고 ?


모원(母院)은 고개를 흔들며 부정했다.
북한에서 돌아온 수녀들에게 이런 한국에서의 청원 사실을 알려주지도 않고 한국

대구에는 귀환 수녀들의 건강이 해외 파견이 불가능하다고 거부의 뜻을 분명히 했다.

그래도 한국에서는 귀환 수녀들의 파견을 거듭 애원했다.
그러나 북한 수용소의

살살이에게 학대를 받았던 건강이 회복 된 수녀들이 거의 모두 한국으로의 파견을
요청하는 것이었다.

모원은 어쩔 수없이 이들의 청을 들어 주었다. 생존 귀환했던 18명의 수녀 중에

결핵 환자같이 건강 관리가 필요한 8명을 제외하고 10명이 한국으로 돌아왔다.

옥사독에서 살아 돌아온 신부와 수사들도 대다수가 한국으로 돌아와 왜관 수도원의

발전에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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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포시 원산 수녀원장이던 겔투르드 링크 수녀가 자신이 원장이 아닌 강등된 

직책을 받았으나 이를 개의치 않고 돌아왔다.

겔트루드 수녀는 대구에서 수련원장으로 많은 수녀들을 양성하고 10년간 봉사했다.

 


1967년 독일 투찡 모원의 총장으로 부임해서 1982년까지 총장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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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장을 퇴임하고 70이 넘는 나이에 브라질의 한국 교포
성당에서
다시 6년간 사목하고 은퇴했다 .

독일로 돌아와 은퇴 생활을 하다가 1999년 선종하였다.
그 녀는 평소 '난 한국인 수녀야.'라는 말을 자주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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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녀는 시인이기도 하다.
옥사독의 극한 상황에서도 썼던 여러 편의 시가
그 녀의
자서전에 수록 되어있다.

블로거 사비나 님이 60년대에 읽으셨다는‘귀향의 노래’가
혹시 이 시집이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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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사독에서 많은 성직자들의 목숨을 구해낸 디오메데스 수녀도 한국으로 돌아와서 

파티마 병원과 상주의 나환자 촌에서 평생 봉사했다.

 


옥사독에서 빈약한 식재료로도 매일 정성을 다하여 식구들을 먹여 살렸던 옵타다

수녀도 돌아왔다.[윗 사진 참조]

 

그 녀는 일생을 한국에서 마쳤다.

옵타다 수녀가 중병에 걸려 선종에 가까웠을 때 남긴 일화는 가슴이 뭉클하게 한다.

 


정신이 몽롱했던 그 녀는 밤중에 일어나서 한사코 주방으로 가려고 했다. 주방으로

들어가면 쌀을 꺼내 씻었다.

만류하면 한 없이 울기 시작했고 두려움에 떨면서 중얼거렸다.

“제발 나를 그냥 두어 주세요!
 
우리 식구들이 너무 굶주려 있단 말입니다.

  뭔가 끓여 주어야 해요!
 
더 이상 보고만 있을 수가 없단 말입니다!“

 

북 공산당들이 옥사독의 독일 성직자들에게 안긴 굶주림이라는 죽음의 고통은 수십 년

뒤 남한 땅까지 쫓아와서 이 노 수녀의 마지막 순간에까지 기승을 부리며 괴롭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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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으로 돌아와 일생을 다 보낸 벨트비나 수녀님에게 물어보았다.

“그 고생을 하시고서 왜 한국 땅에 돌아 오셨어요?”

그 녀는 독일어 액센트가 섞인 경상도 사투리로 태연하게 답하였다.

“ 내가 종신서원을 원산에서 했지.

   여기서 죽어야 겠다고 했는데  한국 수녀들이 다 남한으로 
   
도망쳐 왔다는 말을 들었어.
   그래 내 빨리 돌아가겠다고 했지!“

라고 당연한 듯 말하셨다.

벨트비나 수녀님은 상주군 함창의 학교 설립에 수없는 기부 요청 편지로

모금하여 학교 설립에 큰 기여를 했었다

 


벨트비나 수녀님은 96살의 나이인 지금에도 불편한 다리를 끌고서 매일 두

시간 씩 농사일을 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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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견을 마치고 이 분과 헤어져 수녀원을 나와서 한참 걷다
보니 다리도 불편하신

분이 어느새 수녀원 현관에 나와서 나를 미소 띈 눈으로 배웅하고 있었다.

그 모습은 한국의 양반집 할머니와 다를 바 없었다.


북한의 강제 노동소 생활을 포함한 평생을 한국에서 봉사한 이 노수녀님에게 한국

정부로 부터 아직 아무런 포상이 없었다는 사실에 나는 다소 섭섭한 생각이 들었다.
그저 나는 속으로
"할머니 오래오래 사세요."하고 빌어드렸을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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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 선배들이 북한에서 겪었던 모진 고통과 희생의 덕분에 대구의 베네딕토

수녀원과 왜관의 베네딕토 수도원은 대단한 발전을 했다.

 


내가 벹트비나 수녀님과 대화중에 뜻밖에도 최 루벤 원장 수녀님이 접견실로 나를

찾아와서 인사를 나누었다.

원장이라기보다 국민 이모라는 표현이 딱 어울리게 포근한 인상을 주는 루벤

원장님은 녀원 일로 정신없이 바쁘다고 이 베로니가 수녀님이 귀뜸 해 주었다.

정적인 분위기와 달리 엄청나게 성장한 오늘날의 베네딕토 수녀원 방대한 규모가 

원장직의 격무를 요구하는 것 같았다.

 


현재 베네딕토 수녀원은 미국이나 프랑스등 여러 나라가 한국에 개원한 수녀원들

중에서 수녀가 되고 싶어하는 젊은 한국 소녀들이 가장 입회하고 싶어하는 수녀원의
하나로서 명성을 날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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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왜관 수도원을 중심으로 북에서 희생당한 성직들을 복자로 시성하기 위한 바티칸

청원 사업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원본 : '울프 독'님의 불로그(스크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