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는 세상

"그럼, 한국 환자는 누가 돌보나요?"

권연자 세실리아 2011. 4. 12. 19:18

서른 살 때 한국 와서 구강암수술 '코만도'등 36년간 외과수술 전파
은퇴후 미국 돌아간 뒤 20억 최신 암치료기 예수 병원에 보내주고
자신은 응급실당직으로 근근이 생계 꾸려

 

병원에서 하는 암(癌)수술 중에 '코만도(COMMANDO)'라는 것이 있다. 입 안에 생긴 구강암을

치료하는 방법이다. 암 덩어리가 퍼진 턱뼈는 물론, 암세포가 전이된 목 주변의 림프절까지 몽땅

잘라내고 긁어내는 대(大)수술이다. 하필이면 수술 이름이 2차 세계대전 당시 위세를 떨쳤던 영국

특수부대 '코만도'와 같아 무시무시하게 들리는데, 두경부(頭頸部·머리와 목) 영역에서 가장 난도가

높은 외과 수술이다.

지금은 암 조기진단이 많아져서 이 수술을 받는 환자는 드물지만, 병세가 진행된 구강암 환자는

'코만도'를 받아야 생명을 건질 수 있다.

이 수술이 우리나라에 처음 도입된 것은 1960년대였다. 설대위(薛大偉)라는 외과의사가 최초로

선보였다. 그는 한국인이 아니다. 1954년부터 1990년까지 36년간 전주 예수병원에서 의료선교사로

활약한 미국인 의사 데이비드 존 실(David John Seel)의 한국 이름이 설대위다.

다음은 그의 제자가 회상한 당시 수술실 장면이다. 1967년, 아침부터 푹푹 찌는 무더운 여름. 혀에

암이 생겨 주변으로 퍼진 65세 남자 환자가 '코만도 수술대'에 누웠다. 설대위는 혈관과 신경, 근육을

일일이 확인하며 암 덩어리를 제거하기 시작했다. 요즘처럼 절개와 지혈(止血)이 동시에 이뤄지는

'전기 메스'가 있던 시절이 아니었다. CT나 MRI가 있어서 암이 어디까지 파고들었는지 정확히 알 수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수술은 눈과 손에 의지하며 더디게 진행됐다. 그럼에도 설대위는 뛰어난 절개

기술을 발휘해 수술 부위가 마치 해부학 교과서에 나오는 그림 같았다고 한다.

그는 점심을 빵으로 때웠고, 허기진 저녁에는 날계란을 섞은 우유를 마시며 수술에 임했다. 한시도

수술실을 떠나지 않았고 메스를 놓지 않았다. 수술실에 달랑 하나 붙은 에어컨으로는 감염을 방지하기

위해 겹겹이 입은 수술복 안의 열기를 식힐 수 없었다. 급기야 간호사들은 얼음 주머니를 그의 수술복

안으로 밀어 넣었다. 이마에 줄줄이 흐르는 땀이 시야를 가리자 주변에서 연방 그의 땀방울을 닦아냈다.

그렇게 16시간40분이 지난 다음 날 새벽 3시경, '코만도'는 끝났다. 잠시 눈을 붙인 설대위는 아침 5시

반에 다시 병원으로 나와 수술 환자의 상태를 제일 먼저 돌봤다고 한다.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burbuck@chosun.com

설대위는 당시 의술 수준으로는 도저히 살릴 수 없는 환자들을 극적으로 회생시키는 드라마를 연출했다.

이런 신기(神技)와 헌신 탓에 전국에서 환자가 구름처럼 몰려왔다. 병원 복도와 계단까지 줄을 섰으며,

병원 주변 여관에 수술 대기 환자가 넘쳐났다.

그는 연일 계속되는 수술로 과로한 탓에 폐결핵에 걸리기도 했다.

설대위는 외과 수술로 명성을 날리던 미국 남부 뉴올리언스의 튜레인 의과대학을 수석졸업하고, 외과

의사의 길로 들어섰다. 미래가 촉망받는 젊은 의사였지만 전쟁으로 폐허가 된 한국 땅을 찾아와 외과

수술의 진수를 선보였다. 우리나라 최초로 종양 진찰실을 개설했고, 국내에서 처음으로 암 등록 사업을

펼쳤다. 대한두경부학회를 창립하고 초대 회장을 역임했으며, 최신 방사선 암 치료법도 소개했다.

그는 정년퇴임을 하고 미국으로 돌아가서는 집에 '설대위'라는 문패를 달고 '한국인'으로 살았다.

20억원 상당의 최신형 암 치료기를 예수병원에 보내주기도 했다. 하지만 정작 본인은 쌓아 놓은 재산이

없어 노년에 응급실 당직 의사를 하며 생활비를 벌었다.

말년에 치매를 앓았는데, 미국 병원 중환자실에서 한국말로 뭔가를 계속 말해 미국 의료진을 당황하게

했다고 한다. 그러다 지난 2004년 79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물론 그의 한국행(行)은 선교가 목적이었다. 설대위와 같은 수많은 의료선교사가 이 땅에 있었기에

'울지마 톤즈'의 이태석 신부가 나왔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또한 실력과 품성을 갖춘 외과 의사의

전형이었다. 그에게 수술을 배운 제자들은 그가 외과 의사가 본받아야 할 최고·최선의 모델이었다고

입을 모은다.

요즘 젊은 의사들은 외과를 외면한다. 외과 의사의 삶이 힘들고 어려우면서, 상대적으로 보상은 적다는

이유다. 1970년대 초 미국에 유학 가서 그곳에서 의사 생활을 하려는 한국의 젊은 의사들에게 설대위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럼, 한국 환자는 누가 돌보는 것인가요?" 40년이 지난 지금, 첨단 의료를

자랑하는 한국에서 그의 반문(反問)은 여전히 유효하다. 이제 한국의 외과 수술은 누가 할 것인가.

 

 

원문 : 김철중 의학전문 기자

출처 : 조선닷컴 와플타임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