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는 세상

너무 자연스러운 장 보는 獨총리

권연자 세실리아 2015. 5. 5. 11:07

"몇 년 전 여름 베를린의 한 수퍼마켓에서 누군가 긴소매 베이지색 정장 차림으로 양배추를 고르고 있었다.
'덥지도 않나' 하는 생각으로 고개를 들어 쳐다봤더니 앙겔라 메르켈 총리였다. 그곳은 메르켈의 단골 수퍼였다."

기자는 지난달 중순 저녁 식사 자리에서 이 같은 이야기를 우연히 듣게 되었다. 그 자리에는 독일 기자도 있었지만,
이런 이야기에 전혀 놀라지 않는 눈치였다.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정치인 중 한 명인 현직 독일 총리가 장을 본다?
한국 기자의 사고방식으로는 쉽게 믿기지 않았다.

지난달 23일 찾아간 수퍼마켓. 지하 정육점 직원은 "2주 전에도 왔었다"고 했다.
다음 날 계산대에서 일하는 헬가 마쿠아스씨가 기자의 몇 가지 궁금증을 풀어주었다.
1993년부터 메르켈 총리를 보았다는 그녀는 "캐나다·프랑스·아르헨티나 기자도 당신처럼 찾아왔었지만
'특별 대우는 없다'는 말을 믿지 못하고 돌아갔다"고 했다. 사실인지 확인하기 위해 기다리기 시작했다.
일주일이 지난 30일 오후 방탄 처리가 된 대형 세단 '아우디 A8'가 미끄러지듯 멈춰 섰다. 메르켈 총리가 이미 여러 번
사용해서 꼬깃꼬깃해진 장바구니를 들고 내렸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지난달 30일 저녁 베를린의 단골 수퍼마켓에서 장을 보고 있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지난달 30일 저녁 베를린의 단골 수퍼마켓에서 장을 보고 있다. /한경진 특파원

그녀는 이날 혼자 카트를 이리저리 끌고 다니며, 사야 할 품목을 적은 종이를 꺼내 오렌지와 채소,

치즈와 와인을 샀다. 호객 행위를 하는 청년과 평범한 대화도 나눴다. 과잉 경호는 없었다.

베를린 시민에게 퇴근길 수퍼마켓에 들른 메르켈 총리의 모습은 익숙하고 자연스러운 풍경이었다.

자신의 저녁이 그러하듯, 그들은 메르켈 총리의 사적인 시간을 지켜주려고 했다.

메르켈 총리에게 수퍼마켓은 선거철에나 찾는 정치적 쇼의 무대가 아니었다. 시민들에게 앙겔라 메르켈은

'우리 중의 한 명'일 뿐이었다. '똑같이 먹고사는' 총리의 일상, 그리고 그녀를 아무렇지도 않게 대하며 배려하는

시민들 모습에서 기자는 건강한 사회의 구성원들을 보았다.

분단된 한국의 특수한 안보 상황에선 현직 정치 지도자가 그녀와 같은 동선(動線)으로 활동하는 것은

분명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통일이 온다면 우리도 이런 모습을 꿈꿀 수 있지 않을까?

일주일간 스낵 코너 테이블에 앉아 시간을 보내며 유리창 너머로 회색 건물을 종종 바라보았다.

공교롭게도 메르켈의 수퍼마켓 대각선 맞은편 방향으로는 도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주독 북한대사관 건물이

들어서 있었다.



[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기자수첩] 한경진 베를린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