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는 세상

편지로 한 임종

권연자 세실리아 2015. 6. 19. 20:02

 

임종(臨終)엔 두 뜻이 있다. '죽음을 맞음'과 '부모가 돌아가실 때 곁을 지킴'이다.
어느 뜻이건 임종은 삶과 죽음이 갈라서는 순간이다. 이승과 저승이 교차하는 마지막 고해(告解) 자리다.
떠나는 이가 의식이 있는 동안 가족은 핏줄과 사랑을 확인한다. 한 생(生)을 함께해 행복했다며 서로 고마워한다.
마음속 응어리를 털어놓고 용서를 구한다. 손 붙잡아 하나가 된다.
임종은 가장 슬프면서도 가장 아름답고 숭고한 의식(儀式)이다.

▶메르스 환자의 임종은 쓸쓸하다. 가족까지 격리돼 곁에 없기 일쑤다.
격리 대상 아닌 가족도 방호복 입고 유리창 너머 지켜볼 뿐이다.
숨진 환자는 이중 방수 백에 담긴다. 염(殮)도 못하고 수의도 못 입힌다. 곧바로 화장(火葬)한다.
메르스 환자라면 거절하는 화장장과 장례식장도 많다. 중세 페스트 환자가 따로 없다.
'모시기'보다 '처리하기'에 가깝다. 자식에겐 더한 불효가 없다. 못한 임종이 한(恨)으로 남는다.


	[만물상] 편지로 한 임종
 
 
▶대전 을지대병원 중환자실 예순다섯 살 할머니는 메르스 환자가 아니어도 여드레째 가족을 보지 못했다.
뇌경색으로 입원한 이 병원에서 메르스 환자가 나오면서 격리됐다. 간병하던 남편과 남매도 집에 갇혔다.
할머니는 상태가 나빠져 수술을 받았지만 나아지지 않았다.
그제 남편이 중환자실에 전화를 걸어 "아내에게 가족이 쓴 편지를 읽어달라"고 부탁했다.
다섯 간호사가 할머니 앞에서 남편 편지부터 읽었다.

▶"38년 고생도 하고 보람도 컸는데 갑자기 헤어지게 돼 가슴이 미어집니다.
당신 뜻 잘 새겨 자식·손자들과 살아갈 것이오. 이제 호강할 때 돌아가시니 아쉬움이 너무 큽니다.
이 세상 모든 근심 떨쳐버리고 천국에서 행복하게 지켜봐 주시오."
읽던 간호사가 목이 메어 다른 간호사가 이어받았다. "가난한 집에 시집와 살림 일으키고,
약한 아이들 훌륭하게 키우고, 못난 남편을 회사의 큰 책임자로 키워내고, 노후 준비도 잘했는데…."

▶아들 편지가 이어졌다. "얼굴 한번 보여주는 것이 이리도 힘들까.
세상이 원망스럽기도 했지만 이제 받아들이고 엄마가 이 순간 편안하시길 바랄 뿐입니다."
딸 편지를 읽는 순간 간호사들이 울음을 터뜨렸다.
"엄마 딸로 살아 행복했고 아이들도 엄마가 제게 주신 사랑으로 키울게요. 다음 생에도 엄마와 딸로 만나요."
할머니는 다섯 시간 뒤 편안한 얼굴로 숨을 거뒀다고 한다. 편지로나마 받은 남편의 배웅과 자식의 임종 덕분일 것이다.
모든 것을 가로막는 메르스도 가족의 사랑만은 막지 못했다. 슬프고도 아름다운 사랑이다.



 

글 쓴이 : 오태진 수석 논설위원

[출처] 본 기사는 조선닷컴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