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는 세상

"우리는 청담동 DKNY(독거노인)...한국의 비틀스였다"

권연자 세실리아 2011. 2. 14. 17:11

 

다음 달 10·11일 조영남 콘서트… '50년 우정' 이장희도 무대에
'그건 너' 쓰고 부른 이장희 "울릉도 노래 만들고 싶다"
조영남 "이장희는 갑자기 음악계를 떠난 탐험가"

지난해 추석부터 불기 시작한 '세시봉 열풍'이 수그러들 줄 모른다.

라디오에서 처음 분 이 바람은 TV로 옮겨 온 뒤 해를 넘기면서도 많은 이들의 마음을 훈훈하게

하고 있다. 예순 넘은 남자들의 우정과 그들이 만드는 하모니가, 호들갑투성이인 TV에서 유난히

돋보인 덕이다.

'세시봉 남자들' 가운데 조영남(66)과 이장희(64)는 가장 오랜 친구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세시봉에서 처음 만났으나 이 두 사람은 중·고교 때부터 친했다. 다음 달

10일과 11일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열릴 조영남의 콘서트에도 이장희가 손님으로 설 예정이다.

두 사람을 지난 11일 서울 청담동 조영남의 집에서 만났다.

"우리가 '청담동 DKNY'예요. '독거노인'의 준말이지. 걸어서 10분 거리에 사니까 아침도 같이 먹을

정도예요." 조영남의 입담이 여전했다. 그는 "공교롭게도 둘 다 싱글이고… 공평하게 둘 다 두 번씩

가정을 깼고." 두 사람 모두 두 번의 이혼경력이 있다. "제가 서울중 2학년 때 용문고 1학년이던

영남이 형을 만났어요. 얼마나 노래를 잘하던지 완전히 반했죠. 그때 이후 50년을 사귀는데 한 번도

다툰 적이 없어요."(이장희)

각각 열여섯·열네 살에 처음 만난 조영남(왼쪽)과 이장희의 우정이 50년을 맞았다. 고교생과 중학생이었던 두 사람은 가수와 작곡가로 함께 성장했다. /이명원 기자 mwlee@chosun.com

이장희는 2004년 울릉도에 방 세 칸짜리 집을 마련해 1년의 절반가량은 그곳에서 산다고 했다.

미국 LA와 청담동에도 각각 집이 있다. 1980년 미국으로 건너간 이장희는 늘 "은퇴하면 하와이에서

살아야지" 했었다. 그러나 1997년쯤 우연히 울릉도에 갔다가 그 아름다움에 반해 하와이를 포기했다.

"울릉도는 바다 한가운데 떠있는 산이에요. 비 오는 날 배 타고 울릉도 한 바퀴 돌아보세요. 곳곳에서

없던 폭포가 떨어집니다."

조영남은 이장희가 처음 음악을 한다고 했을 때 "저렇게 무지몽매한 인간이 무슨 음악을 하나 하고

생각했었다"고 했다. 음악교육을 받아본 적 없는 이장희가 악보를 쓸 줄도 읽을 줄도 몰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장희는 '그애와 나랑은'을 비롯해 '그건 너' '한잔의 추억' 같은 히트곡들을 줄줄이 쓰고 불렀다.

조영남의 노래 중 "왓뚜와리와리" 하는 추임새가 특징인 '사랑이란'과 '불 꺼진 창'도 이장희 곡이다.

이장희가 중국 춘추시대 백아(伯牙)처럼 곡을 쓰면 조영남은 그 친구 종자기(鍾子期)처럼 해석해 불렀다.

그러나 이장희는 생각지 못했던 사건으로 절현(絶絃·줄을 끊음)을 결심했다. 1975년 이른바 '대마초 파동'

때 구치소에 들어가 "내 인생의 좌표는 무엇인가" 하고 고민하던 그는 결국 음악계를 떠났다.

이후 의류사업으로 종잣돈을 만든 뒤 미국으로 건너가 '라디오 코리아'를 성공시키고 2003년 은퇴할 때

까지 꽤 큰돈을 벌었다. 조영남은 "장희가 어렸을 때 '세상엔 돈을 벌다가 죽는 남자가 있고 번 돈을 쓰다가

죽는 남자가 있는데 나는 쓰다가 죽고 싶다'고 했었다"고 말했다. 그 말대로 이장희는 미국과 서울, 울릉도를

오가며 자유롭게 살고 있다. 그를 '탐험가'라고 표현한 조영남은 "랭보나 뒤샹 같은 예술가들은 모두 갑자기

창작을 관두고 엉뚱한 일을 하다가 갔는데 이 친구도 비슷한 '변태'"라며 "우리나라엔 이장희와 김민기란

두 변태가 있다"고 했다.

그러나 이장희가 음악을 떠났을 뿐 음악은 그를 떠나지 않았다. '사랑과 평화'의 히트곡 '한동안 뜸했었지'와

'장미' '어머님의 자장가'가 모두 이장희의 곡이다(당시엔 남의 이름으로 발표했었다).

1988년엔 우순실의 앨범을 만들고 김완선에게도 곡을 써줬었다. 그는 "앞으로 울릉도에 대한 노래를 꼭

만들어 발표하고 싶다"고 했다.

"모든 예술 중에서 음악이 가장 강렬한 것 같아요. 어떤 음악은 5초 만에 사람을 꼼짝 못하게 하죠. 음악이

귀만 간질이고 가는 것 같아도 이렇게 수백, 수천 번씩 다시 듣게 되는 예술이 있습니까." 이장희의 얘기를

한참 듣던 조영남이 말했다. "한국에도 비틀스가 있었던 거야. 우리가 한국의 비틀스였어."

1974년 스물일곱 살 이장희는 이런 노래를 썼다. "내 나이 육십하고 하나일 때 나는 그땐 어떤 사람일까/…

/ 그때도 울을 수 있고/ 가슴속엔 꿈이 남아 있을까."

피아노와 이젤, 원고지를 바삐 오가는 조영남과, 새로 녹음장비 일습(一襲)을 마련했다는 이장희를 보며

두 사람의 멋진 60대가 문득 부러워졌다. 

 

 

원문 : 한현우기자(hwhan@chosun.com)

출처 : 조선닷컴 와플타임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