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읽고싶은 詩 53

그거 안 먹으면

아침저녁 한 움큼씩 약을 먹는다 약 먹는 걸 더러 잊는다고 했더니 의사선생은 벌컥 화를 내면서 그게 목숨 걸린 일이란다 꼬박꼬박 챙기며 깜박 잊으며 약에 걸린 목숨이 하릴없이 늙는다 약 먹는 일 말고도 꾸역꾸역 마지못해 하고 사는 게 깜박 잊고 사는 게 어디 한두 가지랴 쭈글거리는 내 몰골이 안돼 보였던지 제자 하나가 날더러 제발 나이 좀 먹지 말라는데 그거 안 먹으면 깜박 죽는다는 걸 녀석도 깜박 잊었나보다 ―정양(1942~ ) ('시와 정신', 2016년 겨울호)

산 그림자

산 그림자 그는 누구에게도 마음을 열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래도 그에게 온갖 이야기를 털어놓고 간다 자신의 비밀과 허물을 뱀처럼 벗어 놓고서 다행히 그에겐 모든 걸 숨겨 줄 깊은 골짜기가 있다 그런 그가 깊고 조용한 그녀를 보는 순간 그동안 가슴에 쌓인 응어리를 다 풀어놓고 싶어졌다 어머니의 고요한 품을 더듬어 찾듯이 그 응달에 다 풀어내고 싶어졌다 이순희 시인(1961~ ) 모든 사람에게는 근심이 새로이 생겨난다. 근심은 솟는, 푸른 우물물처럼 깊고도 은밀하다. 그 근심을 당장 누군가의 앞에 꺼내놓기는 참으로 어렵다. 흉금을 털어놓고 말할 사람을 만나기도 쉽지 않다. 그러니 근심은 쌓여간다. 산 그림자 같은 사람이 여기 있다. 조용한 인품을 지닌, 어머니처럼 어질고 넉넉한 품을 지닌 사람. 은은하고 깊은..

배롱나무 꽃이 울었다

어떻게 말해야 할까,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에 대해 배롱나무 꽃이 피었느냐고 아직도 나는 묻지를 못하는데 도요에 든 항아리처럼 잎과 살은 타버리고 정신의 뼈만 오롯이 남아 네가 수도원으로 깊이 숨어버린 그날 배롱나무 꽃이 울었다 그때 너를 본 건 TV뉴스 카메라에 잡혀 화면 가득 클로즈업 된 얼굴, 시위대 속에 섞여 구호를 외치는 너무도 낯익어 낯선 얼굴 불끈 쥔 앳된 주먹이 허공에서 맴돌고 있었지 너를 찾아 주말이면 서울로 오르내리던 막막한 길 마음이 온통 가시밭이던 그길 밖에는 배롱나무 꽃이 눈물처럼 피는데 꽃이 보이지 않는 그 아득함을 세상 어미 아비들은 아느니 그늘진 데 하나 없던 어디에 세상을 향한 그리 단단한 옹이가 박혔던 걸까 친구들을 버릴 수 없다고 뒤에서 지키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