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밤 떠난 사람 보고 싶어서 풀들은 더 촘촘히 돋아나 텃밭도 마당도 장독대도 두엄자리도 아무 데도 안 가리고 우거지더니 우거지다 지친 풀들 길 잃고 아무 데나 드러눕는 빈집에 술 취한 달빛이 가득 고였다 한세상 번번이 길 잘못 들어 영영 길 잃어버린 얼굴들이 달빛 쓰러진 풀밭에 어른거린다 鄭 洋(1942~ ) 현대문학 2017 7월호 다시 읽고싶은 詩 2021.01.14
나그네 그대에게 가는 길이 세상에 있나 해서 길따라 나섰다가 여기까지 왔습니다 끝없는 그리움이 나에게는 힘이 되어 내 스스로 길이 되어 그대에게 갑니다 -안도현- 다시 읽고싶은 詩 2020.12.28
그거 안 먹으면 아침저녁 한 움큼씩 약을 먹는다 약 먹는 걸 더러 잊는다고 했더니 의사선생은 벌컥 화를 내면서 그게 목숨 걸린 일이란다 꼬박꼬박 챙기며 깜박 잊으며 약에 걸린 목숨이 하릴없이 늙는다 약 먹는 일 말고도 꾸역꾸역 마지못해 하고 사는 게 깜박 잊고 사는 게 어디 한두 가지랴 쭈글거리는 내 몰골이 안돼 보였던지 제자 하나가 날더러 제발 나이 좀 먹지 말라는데 그거 안 먹으면 깜박 죽는다는 걸 녀석도 깜박 잊었나보다 ―정양(1942~ ) ('시와 정신', 2016년 겨울호) 다시 읽고싶은 詩 2020.12.24
산 그림자 산 그림자 그는 누구에게도 마음을 열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래도 그에게 온갖 이야기를 털어놓고 간다 자신의 비밀과 허물을 뱀처럼 벗어 놓고서 다행히 그에겐 모든 걸 숨겨 줄 깊은 골짜기가 있다 그런 그가 깊고 조용한 그녀를 보는 순간 그동안 가슴에 쌓인 응어리를 다 풀어놓고 싶어졌다 어머니의 고요한 품을 더듬어 찾듯이 그 응달에 다 풀어내고 싶어졌다 이순희 시인(1961~ ) 모든 사람에게는 근심이 새로이 생겨난다. 근심은 솟는, 푸른 우물물처럼 깊고도 은밀하다. 그 근심을 당장 누군가의 앞에 꺼내놓기는 참으로 어렵다. 흉금을 털어놓고 말할 사람을 만나기도 쉽지 않다. 그러니 근심은 쌓여간다. 산 그림자 같은 사람이 여기 있다. 조용한 인품을 지닌, 어머니처럼 어질고 넉넉한 품을 지닌 사람. 은은하고 깊은.. 다시 읽고싶은 詩 2015.01.09
배롱나무 꽃이 울었다 어떻게 말해야 할까, 우리가 잃어버린 것들에 대해 배롱나무 꽃이 피었느냐고 아직도 나는 묻지를 못하는데 도요에 든 항아리처럼 잎과 살은 타버리고 정신의 뼈만 오롯이 남아 네가 수도원으로 깊이 숨어버린 그날 배롱나무 꽃이 울었다 그때 너를 본 건 TV뉴스 카메라에 잡혀 화면 가득 클로즈업 된 얼굴, 시위대 속에 섞여 구호를 외치는 너무도 낯익어 낯선 얼굴 불끈 쥔 앳된 주먹이 허공에서 맴돌고 있었지 너를 찾아 주말이면 서울로 오르내리던 막막한 길 마음이 온통 가시밭이던 그길 밖에는 배롱나무 꽃이 눈물처럼 피는데 꽃이 보이지 않는 그 아득함을 세상 어미 아비들은 아느니 그늘진 데 하나 없던 어디에 세상을 향한 그리 단단한 옹이가 박혔던 걸까 친구들을 버릴 수 없다고 뒤에서 지키게.. 다시 읽고싶은 詩 2014.08.26
밀어 / 서정주 밀어 순이야, 영이야, 또 돌아간 남아. 굳이 잠긴 잿빛의 문을 열고 나와서 하늘가에 머무른 꽃봉오릴 보아라 한없는 누에실의 올과 날로 짜 늘인 채일을 두른 듯, 아늑한 하늘가에 뺨 부비며 열려 있는 꽃봉오릴 보아라 순이야, 영이야, 또 돌아간 남아. 저, 가슴같이 따뜻한 삼월의 하늘.. 다시 읽고싶은 詩 2013.06.17
저녁 노을 저녁 노을 / 이해인 있잖니, 꼭 그맘때 산 위에 오르면 있잖니, 꼭 그맘때 바닷가에 나가면 활활 타다 남은 저녁놀 그 놀을 어떻게 그대로 그릴 수가 있겠니. 한번이라도 만져보고 싶은 한번이라도 입어보고 싶은 주홍의 치마폭 물결을 어떻게 그릴 수가 있겠니. 혼자 보기 아까와 언니를 .. 다시 읽고싶은 詩 2013.06.13
이런 꽃 / 오태환 이런 꽃 순 허드레로 몸이 아픈 날 볕바른 데마다 에돌다가 에돌다가 빈 그릇 부시듯 피는 꽃 ―오태환(1960~ ) 딱히 어디랄 것 없이 무겁고 아픈 것, 그러니까 '허드레로' 아픈 것은 몸이 아픈 것이 아니리라. 그리운 이를 보지 못해 생긴 병이며 어딘가에서 나를 보고 싶어 하는 이가 있어 .. 다시 읽고싶은 詩 2013.06.10
은방울 꽃 / 이해인 은방울 꽃 삶이란 종소리를 듣는 기쁨인가요? 오늘도 살아 있다고 종을 치세요 작게 낮게 그러나 당당하게! 가슴에 쌓인 노래들이 마침내 터져나와 조롱조롱 달려 있는 하얀 기쁨들 원하시면 드릴게요 종소리와 함께 - 시 : 이해인 사진 : 이영렬 다시 읽고싶은 詩 2013.05.27
신록 / 정양 시인 신록 뭐가 그리 급해서 잎도 트기 전에 꽃부터 피나 속곳 한 올 안 걸친 알몸으로 민망하게 핀 그 봄꽃들이 몸부림치며 흩날리는 동안 덩달아 몸살하던 말 다 참아버렸거니 울긋불긋 참아버린 말들 꽃보다 촘촘히 연초록 혀로 돋아나 먼저 다녀간 몸살을 핥는다 - 정양 시인- -「문학의 오.. 다시 읽고싶은 詩 2013.04.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