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읽고싶은 詩 53

새의 화석에 새가 없는 이유

새의 화석에 새가 없는 이유 -오인태 詩人- 뒤벼리*, 빗장을 열고 새 한 마리 빠져 날아가더라니, 훌쩍 사랑한다는 건, 이렇듯 스스로 가슴속에 감옥을 지어 슬픔이든지 그리움이든지 멀쩡한 얼굴 하나 가두는 일 언제 날아가 버릴지도 모를 여기에 와서 내 비록 사람의 갈비뼈가 왜 숭숭한지 알지라도 그 새, 또 한 사람 대책 없이 캄캄한 가슴에 묻으며 천 년 만 년 층진 이 암벽의 흔적 하나를 가만히 쓰다듬어보는 것인데 (*진주 남강변에 있는 퇴적단층을 끼고 도는 길의 지명, 이 길을 연인끼리 걸으면 헤어진다는 속설이 있다.) -시집『아버지의 집』에서

개나리꽃 -빈집의 꿈 1 / 정양 詩人

개나리꽃 - 빈집의 꿈 1 개나리꽃 울타리가 눈부시다 지붕이 폭삭 내려앉은 집 누가 살았었던가 어떻게 집 떠났던가 지금은 어느 뼈빠지는 강산에 사무쳐 영영 돌아오지 않는가 안 보아도 다 알고 있다는 듯이 다 알고 있어서 더 미치겠다는 듯이, 눈깜땡깜 엉망진창으로 피어서 휘늘어진 개나리꽃 방문도 부엌문도 사립문도 다 떨어져나가고 앞뒤로 휑하게 눈부시는 꽃 미치게 눈부시는 집 정 양 시집 '빈집의 꿈' 중에서-

상처에 대하여

상처에 대하여 오래 전 입은 누이의 화상은 아무래도 꽃을 닮아 간다 젊은 날 내내 속썩어쌓더니 누이의 눈매에선 꽃향기가 난다 요즈음 보니 모든 상처는 꽃을 꽃의 빛갈을 닮았다 하다못해 상처라면 아이들의 여드름마저도 초여름 고마리 꽃을 닮았다 오래 피가 멎지 않던 상처일수록 꽃향기가 괸다 오래된 누이의 화상을 보니 알겠다 향기가 배어나는 사람의 가슴속엔 커다란 상처 하나 있다는 것 잘 익은 상처에선 꽃향기가 난다 - 복효근 詩人 -

단풍 / 정양 시인

단풍 단풍잎만 단풍이 아니다 가으내 물드는 건 다 단풍이다 정년퇴임한 가을이 산마다 곱다 얼레덜레 물들던 산그늘이 알록달록 수런거리던 산자락이 골짜기마다 마침내 울긋불긋 타오르거니 새우는 소리 눈물 없듯 골짜기들 타올라도 연기 없거니 막판이 저렇듯 타오른다면 사람살이 얼마나 아름다우랴 타오르는 골짜기들이 소리도 눈물도 연기도 없이 막판의 가슴을 훑어내린다 정 양 詩人 -한국문학」2012년 겨울호에서-

먼 산을 보며 2

먼 산을 보며 2 아침저녁 하늘빛이 바뀔 때마다 먼 산들도 제각각 빛갈이 다르다 멀수록 더 가깝게 하늘빛을 닮아가는 산 너랑 불붙어 엉망진창으로 타오르던 진달래 복사꽃들이 목숨 걸고 출렁이던 보고 싶은 보고 싶은 목소리들이 어느 결에 저렇듯 먼 산으로 적막한 하늘빛으로 자리잡고 있었구나 꽃들은 왜 해마다 피고 지는지 새들은 모두 저 하늘 어디로들 날아가는지 먼 산의 적막한 윤곽으로 가물거리며 이제는 조금씩 알 것 같다 너를 보내고 바라보는 먼 하늘로 더 먼 산들로 가을이 오고 겨울이 간다 - 鄭 洋 시인(1942~ )

슬픈 시

슬픈 시 술로써 눈물보다 아픈 가슴을 숨길 수 없을 때는 세상에서 가장 슬픈 시를 적는다 별을 향해 그 아래 서 있기가 그리 부끄러울 때는 세상에서 가장 슬픈 시를 읽는다 그냥 손을 놓으면 그만인 것을 아직 가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쓰러진 뒷모습을 생각잖고 한쪽 발을 건너 디디면 될 것을 뭔가 잃어버릴 것 같은 허전함에 우리는 붙들려 있다 어디엔들 슬프지 않은 사람이 없으랴마는 하늘이 아파, 눈물이 날 때 눈물로도 숨길 수 없어 술을 마실 때 나는, 세상에서 가장 슬픈 시가 되어 누구에겐가 읽히고 있다. 서정윤 詩人(1957 ~ )

말하지 못하는 말

말하지 못하는 말 - 엽서 2 바다가 우는소리에 잠에서 깨었습니다 바다가 우는 게 아니라 밤새 숲이 울고 있었습니다 세상의 울음들 서로 닮아 있어 숲에선 바다가 울고, 바다에서 숲이 울고 어젯밤 당신이 보내주신 시의 숨결이 또한 그러하였습니다 시가 울음이었습니다 울음이란, 말하지 못하는 말 맨 마지막 언어인 것을 알았습니다 울음만 짚어보다 일생이 지날 것 같습니다 권 귀 순 詩人(1941~ )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 류시화 물 속에는 물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는 그 하늘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내 안에는 나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내 안에 있는 이여 내 안에서 나를 흔드는 이여 물처럼 하늘처럼 내 깊은 곳 흘러서 은밀한 내 꿈과 만나는 이여 그대가 곁에 있어도 나는 그대가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