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46

회화를 구속했던 규율을 깬 세잔의 사과

폴 세잔, 사과 바구니, 1895년, 캔버스에 유채, 65×80cm, 시카고 아트인스티튜트 소장. 피카소와 마티스는 평생 경쟁자였지만 폴 세잔(Paul Cézanne·1839~1906)에 대해서는 ‘우리 모두의 아버지’라고 입을 모았다. 화가 모리스 드니는 ‘이브의 사과, 뉴턴의 사과, 그리고 세잔의 사과’가 인류 역사를 바꿨다고 했다. 물론 스티브 잡스의 사과가 나오기 전이다. 정작 세잔의 사과 그림을 보면 적잖이 당황스럽다. 바구니에서 쏟아져 나온 사과들이 예쁘거나 탐스럽지 않고, 유리병은 비뚤어졌으며, 접시에 쌓은 과자는 허공에 떠 있는 것 같고, 어색하게 구겨 놓은 냅킨 아래의 테이블은 두 동강이 났는지 좌우 높낮이가 완전히 다르기 때문이다. 모든 정물이 이토록 불안정하게 놓였는데도 전체를 보면 ..

그림 2021.09.14

‘차가운 추상’ 그 이전의 나무

‘칸딘스키는 뜨거운 추상, 몬드리안은 차가운 추상’이라는 말은 학창 시절 미술 시간에 한 번쯤은 들어봤을 것이다. 강렬한 색채가 어지럽게 펼쳐진 칸딘스키의 그림은 화가의 열정적인 성정을 드러낸 것 같고, 화면을 수직선과 수평선으로 나누고, 빨강, 노랑, 파랑의 삼원색만을 사용한 피에트 몬드리안(Piet Mondrian·1872~1944)의 추상화를 보면 그는 과연 냉철한 이성의 소유자처럼 보인다. 그러나 몬드리안의 빨간 나무는 과연 같은 사람이 그린 게 맞을까 싶게 뜨겁다. 나무 한 그루가 파란 하늘 아래 석양을 받아 빨갛게 빛난다. 가지 끝에 매달린 노란 이파리 몇 개를 빼고는 낙엽마저 모두 떨군 겨울나무지만, 틀을 뚫고 나갈 기세로 사방을 향해 뻗어 나간 나뭇가지는 지금 막 새로 태어나 기지개를 켜는..

그림 2021.08.02

겨울 풍경

프란체스코 포스키, 겨울 풍경, 1770년경, 캔버스에 유채, 48x75㎝, 개인 소장. 앞으로 석 달이면 찬 바람이 불겠지만, 요즘 같은 불볕더위에는 매년 겪던 한파도 상상이 안 된다. 이럴 때 프란체스코 포스키(Francesco Foschi·1710~1780)의 ‘겨울 풍경’을 보면 잠시나마 더위가 물러난다. 겨울이 오면 이 그림처럼 벌거벗은 나뭇가지에 흰 눈이 쌓이고, 처마 아래로 고드름이 주렁주렁 열리며, 길이 얼어붙어 발걸음을 떼기가 두려울 것이다. 살을 에는 매서운 한기가 뿌옇게 눈앞을 가릴 때 한숨이라도 내쉴라치면 하얀 입김이 되어 순식간에 흩어지고 대신 찬 바람이 목구멍까지 넘어 들어올 것이다. 포스키는 이탈리아 중부 동쪽 해안 안코나의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나 근교에서 활동하다 로마에 정착..

그림 2021.07.28

[이 한장의 그림] ‘꽃의 왕’, 모란

국립고궁박물관 ‘안녕, 모란’展 비단 위에 강렬한 색채로 그린 이 화사한 모란 그림은 뜻밖에도 조선 왕실의 흉례(凶禮) 때 사용되던 것이다. 모란이 뿌리에서 가득 뻗어 나는 모습을 표현한 4폭 병풍의 일부로, 망자의 관 주위에 두르거나 혼전(왕이나 왕비의 국장 뒤 3년 동안 신위를 모시던 전각)의 벽에 붙였던 것이다. ‘꽃의 왕’이라는 모란이 주는 엄숙하고 경건한 분위기를 통해 상장례의 공간을 신성하게 만드는 동시에, 풍성한 꽃의 이미지로 왕실의 번영과 안녕을 기원하려는 목적이었다. ‘모란도 병풍’(일부), 19세기 조선, 비단에 채색, 화면 폭 212.2×74.8㎝. /문화재청 국립고궁박물관이 7일 개막해 10월 31일까지 여는 ‘안녕, 모란’ 특별전은 부귀와 영화를 상징하는 귀한 꽃이었던 모란을 통해..

그림 2021.07.08

남편 김환기 죽은 뒤 완성한 초상화

“花岸, 내 마음속에 살아나다오” 김향안 여사가 남편 김환기의 별세 직후 완성한 유화 '김환기 초상'(1974). /ⓒ환기미술관 남편 김환기(1913~1974)가 죽고, 아내는 남편의 초상화를 완성했다. 무심히 담배 한 개비 입에 문 남편의 얼굴을 바라보며 아내는 캔버스 뒷면에 붓으로 이렇게 적었다. “花岸 내 마음속에 살아나다오.” 花岸(화안)은 아내가 붙여준 김환기의 또 다른 이름이자, 아내에게만 허락된 애칭이었다. 화가이자 문필가였고 김환기의 예술 세계 확장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김향안(1916~2004) 여사를 조명하는 전시 ‘김향안, 파리의 추억’이 서울 부암동 환기미술관 달관에서 12월까지 열린다. 본명 변동림, 시인 이상의 아내였고, 이후 애 셋 딸린 가난한 김환기와 재혼하며 남편의 호(號)..

그림 2021.06.25

초록색 벽의 치명적 유혹

[우정아의 아트 스토리]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케르스팅, 수 놓는 여인, 1817년, 목판에 유채, 47.5x36.3㎝, 바르샤바 국립 미술관 소장. 부드러운 햇살이 들어오는 창가에서 한 여인이 수를 놓는다. 단정하게 빗어 올린 금발 머리와 수틀 위에서 섬세하게 움직이는 손가락의 주인은 화가 루이즈 자이들러. 그녀는 친구였던 독일 초상화가 게오르크 프리드리히 케르스팅(Georg Friedrich Kersting·1785~1847)의 여러 그림에 모델이 돼주었다. 그녀의 팔을 따라 흐르듯 주름진 옷소매는 창문에 걸려있는 커튼 주름과 호응하고, 단순하되 밋밋하지 않은 곡선의 의자와 테이블은 가녀리면서도 흔들림 없이 작업에 집중하는 여인의 우아한 몸놀림을 닮았다. 케르스팅의 실내 풍경은 이처럼 인물화의 단순한 ..

그림 2021.06.17

화가 이중섭을 길러낸 스승 임용련과 백남순

최초로 서양서 미술 유학한 부부 교사… ‘국민 화가’ 이중섭을 길러내다 ‘이건희 컬렉션’으로 재회한 이중섭과 스승 임용련·백남순 이건희 컬렉션이 국가에 대량 기증되어 국민적 관심을 모으고 있다. 처음 작품 목록이 공개되었을 때, 개인적으로 눈길을 끄는 작품이 2점 있었다. 이중섭의 ‘피란민과 첫눈’과 ‘섶섬이 보이는 풍경’이다. 한 점은 국립현대미술관에, 다른 한 점은 서귀포 이중섭미술관에 기증되었다. 필자는 2016년, 이중섭 탄생 100주년을 기념한 ‘이중섭, 백 년의 신화’ 전시를 준비할 때 이 두 작품을 애타게 찾았다. 도판으로는 전해지지만 약 50년간 실물이 나오지 않고 있었다. 당시 공동주최사인 조선일보에 부탁해 ‘그림을 찾습니다’라고 사고(社告)까지 내면서 그림의 행방을 찾았다. 이런 방법이..

그림 2021.06.09

마르크 샤갈과 그가 사랑했던 마을 생 폴 드 방스의 추억

시작가 45억 마르크 샤갈 ‘이건희 컬렉션’과 같은 시기에 제작된 마르크 샤갈의 1973년 작 ‘생폴드방스의 정원’(81×116㎝)이 42억에 낙찰됐다. 26일 오후 열린 케이옥션 경매에서 샤갈의 '생폴드방스의 정원'은 41억원에서 출발, 5000만원씩 호가해 42억을 쓴 서면 응찰자에게 팔렸다. 추정가는 45억원이었다. 42억에 새 주인을 찾은 샤갈 그림은 국내 경매에서 거래된 샤갈 작품 중 최고가를 경신했다. 그동안 최고가 기록은 2019년 11월 서울옥션 홍콩경매에서 37억6000만원에 낙찰된 '파리의 풍경'이다. '생 폴 드방스'는 최근 공개된 '이건희 컬렉션'에 포함되어 있는 '붉은 꽃다발과 연인들'(1975)과 비슷한 시기에 같은 지역인 프랑스 남부의 생 폴 드방스에서 제작된 작품이어서 경매전..

그림 2021.05.31

김광섭 '가짜 부고'가 낳은 명작,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서정주 등 시인들과 교감한 근현대문화계 ‘핵인싸’ 김환기 대표작 중 하나인 점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1970). 미국에서 시인 김광섭의 ‘가짜 부고'를 듣고 애도하며 캔버스 가득 푸른 점을 채워 만들었다. /환기재단·환기미술관 제공 2년 전 김환기(1913~1974)의 작품 ‘우주’가 한국미술품 경매 사상 최고가인 132억원에 낙찰됐다는 소식이 신문지 상을 도배했던 날, 나는 우연히 인터넷 기사 댓글을 보게 되었다. 간혹 이런 댓글이 눈에 띄었다. “말이 되느냐?” “이런 게 무슨 132억원이냐” “그림 값은 사기” “현대미술은 그들만의 리그”…. 이런 반응이 이해되는 측면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김환기가 살아온 세월, 그의 피땀 어린 노력, 끝없는 고뇌, 뭔가 제대로 된 것을 만..

그림 2021.05.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