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읽고싶은 詩 53

가슴에서 마음을.... / 류시화

가슴에서 마음을 떼어 버릴 수 있다면 누가 말했었다. 가슴에서 마음을 떼어 강에 버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그러면 고통도 그리움도 추억도 더 이상 없을것이라고. 꽃들은 왜 빨리 피었다 지는가. 흰 구름은 왜 빨리 모였다가 빨리 흩어져 가는가. 미소 지으며 다가왔다가 너무도 빨리 내 곁에서 멀어져 가는것들. 들꽃들은 왜 한적한 곳에서 그리도 빨리 피었다 지는것인가. 물은 왜 작은 돌들 위로 물살져 흘러 내리고 마음은 왜 나자신도 알 수 없는 방향으로만 흘러가는가. 류시화 詩人 (1959 ~ )

노을 / 안도현

노을 내 자전거 퇴근길 돌맹이 길 김제 만경 들판 끝에 노을이 모여 있네 서햇가 사람들도 분명히 쳐다볼 노을이 뜨겁게 끓으며, 그 사상이 세상에 넘칠 듯 왼쪽 오른쪽도 없이 온통 노을은 아, 나를 내려다 보고 있었네 나에게 그동안 무얼 했느냐고 나는 20년 후의 조국을 가르치는 사람이라고 그러나 어찌 이 더러운 입을 열 수가 있나 추억을 물으면 철새 같은 이사 출생지는 낙동강 그 몇 해 남한강, 금호강 물밑에 길들여지는가 했더니 오늘은 전라도라 만경강가에서 갈가리 찢어져 저녁밥 먹으로 가는 죄 많은 교사가 되어 남편이 되어 노을이여 나도 한때는 생각했었네 안도현 詩人 (1961~ )

눈 내리는 길 내게로 오라

눈 내리는 길로 오라 눈을 맞으며 오라 눈 속에 눈처럼 하얗게 얼어서 오라 얼어서 오는 너를 먼 길에 맞으면 어쩔가 나는 향기로이 타오르는 눈 속의 청솔가지 스무 살 적 미열로 물드는 귀를 한 자끔 눈 쌓이고, 쌓인 눈밭에 아름드리 해 뜨는 진솔길로 오라 눈 위에 눈같이 쌓인 해를 밟고 오라 해 속에 박힌 까만 꽃씨처럼 오는 너를 맞으면 어쩔까 나는 아질아질 붉어지는 눈밭의 진달래 석 달 열흘 숨겨 온 말도 울컥 터지고 오다가다 어디선가 만날 것 같은 설레는 눈길 위에 늙어 온 꿈 삼십 년 그 거리에 바람은 청청히 젊기만 하고 눈밭은 따뜻이 쌓이기만 하고 홍윤숙 詩人 (1925 ~ )

'비스와바 심보르스카'의 詩

두 번이란 없다 두 번은 없다.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무런 연습 없이 태어나서 아무런 훈련 없이 죽는다. 우리가, 세상이란 이름의 학교에서 가장 바보 같은 학생일지라도 여름에도 겨울에도 낙제란 없는 법. 반복되는 하루는 단 한 번도 없다. 두 번의 똑같은 밤도 없고, 두 번의 한결같은 입맞춤도 없고, 두 번의 동일한 눈빛도 없다. 어제, 누군가 내 곁에서 네 이름을 큰 소리로 불렀을때, 내겐 마치 열린 창문으로 한 송이 장미꽃이 떨어져 내리는 것 같았다. 오늘, 우리가 이렇게 함께 있을 때, 난 벽을 향해 얼굴을 돌려버렸다. 장미? 장미가 어떤 모양이었지? 꽃이었던가, 돌이었던가? 힘겨운 나날들, 무엇 때문에 너는 쓸데없는 불안으로 두려워하는가. 너는 존재한다---그러므..

사포(Sappho)의 詩 / 능금

구스타프 크림트(Gustav Klimt, 오스트리아)가 그린 사포(Sappho, BC 7-6세기 고대 그리스의 여류 시인) 능 금 높다란 나무가지에 걸려 있어 과일 따는 이 잊고 간 아니 잊은것은 아니련만 얻기 어려워 남겨놓은 새빨간 능금처럼 (소녀시절, 무슨 이유에선가 이 시가 무척 깊은 느낌을 주었다. 외어서 자주 새겨보던 시인데 지금까지도 줄줄 외우고 있는, 서글픈 애착을 가지고 있는 詩이다.)

오래된 편지

오래된 편지 내 푸른 지갑 속에는 오래된 편지 하나 있습니다 착착 접힌 모서리가 너무 낡아 해지고 조금씩 바랜 필적은 먼 산으로 지는 노을처럼 엷어지다가 어느 날 문득 사라질까 겁이 나는 편지 하나 있습니다 한때는 설레는 기쁨이었으나 행복이었으나 이제 가라앉은 그리움 같기도 하고 때때로 미열처럼 지나가는 오래 앓아온 병 같기도 하고 어쩌면 내 한쪽 가슴 같기도 합니다 글자가 바래 흐려지듯 당신의 얼굴이 나날이 희미해져 다시는 떠오르지 않을까 걱정도 하면서 아주 닳아 없어질까 자주 꺼내보지도 못하는 오래된 편지 하나 있습니다 권 귀 순 詩人(1941- )

칼잠을 자며

칼잠을 자며 칼잠을 자며 봄꿈이 길다 해맑은 몸 뒤틀며 피는 진달래 꽃밭이던가 어디로 가서 누굴 보고 싶던가 무슨 일로 그렇게 목숨을 걸었던가 무슨 일 저질러놓고 목놓아 울고 싶던가 물길도 산길도 안 가리고 맨발로 짓이기며 찾아가던 길 …………… 짐작만 남은 선잠머리로 무슨 일 저질러놓고 떠나나보다 새벽 자동차 소리 창틀을 흔들며 숨이 가쁘다 鄭 洋 시인(194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