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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를 그리워하며...

어제가 어머니 기일이었다. 그러나 나는 글 한 줄도 쓸 수 없이 머리가 아팠다. 1994년, 6월 9일 고단했던 한 생을 마감하고 천국으로 떠나신 후 28년 째 되는 날... 일본이 우리나라를 강점하고 모든 것이 통제되고 압박받던 시절 미국 유학은 일년에 한 두명 정도 갈 수 있는 드문 일이었다고 한다. 나의 어머니는 그런 시기에 이화전문을 졸업하시고 장학금을받아 배를 타고 머나먼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셨다. 졸업 논문도 A를 받아 공부를 더 하고 가라는 총장님의 권유를 뒤로하고 귀국한 엄마.... 촉망받던 젊은 날의 찬란했던 시간들은, 천재라는 칭송을 받으며 동경제대 법문학부를 나오신 아버지와 결혼하신 순간부터 모든 것은 허물어졌다. 세상의 부귀영화를 혐오하고 숨어 살기를 원하는 아버지를 세상으로 끌어내..

물푸레 마을에 살며...

꼭, 작년 이맘때였지. 오월 특유의 싱그러운 기운을 받으러 산책길에 나섰다가 하얗게 눈을 이고 있는 듯한 나무들을 발견했다. 무슨 나무일까, 궁금증에 본능적으로 사진부터 찍었다. 아!... 그 신비스런 나무가 바로 '물푸레나무'란다! '물푸레 마을'이란 이름을 가진 '詩' 같은 마을에 이사 와서 이년 넘게 살았는데, 얼마나 마음을 닫고 살았기에 이제야 너를 알아봤을까 가슴을 치며 미안해 했었다. 금년에도 높직한 아파트에서 내려다 보니 눈을 이고 있는 듯한 나무들이 보였다. 아, 작년 그맘때구나! 서둘러 내려가서 시간 가는줄도 모르고 여기저기 헤매듯 걸었다. 물푸레나무가 가로수로 심겨진 동네라니! 어쩌다가 이 마을에 살고 있다는 행복감.....^^ 동산으로 올라가보니 어느새 커다란 잎을 달고있는 떡갈나무며..

서시(序詩)

간이식당에서 저녁을 사 먹었습니다 늦고 헐한 저녁이 옵니다 낯선 바람이 부는 거리는 미끄럽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여, 당신이 맞은편 골목에서 문득 나를 알아볼 때까지 나는 정처 없습니다 당신이 문득 나를 알아볼 때까지 나는 정처 없습니다 사방에서 새소리 번쩍이며 흘러내리고 어두워가며 몸 뒤트는 풀밭, 당신을 부르는 내 목소리 키 큰 미루나무 사이로 잎잎이 춤춥니다 -이성복(1952~) 내가 읽은 서시 중에 가장 아름다운 서시. 시집 ‘남해 금산’의 첫머리에 나오는 시인데, 젊은 날 이성복 시인의 날카로운 감수성과 순수한 열정이 우리를 긴장시킨다. 그냥 그렇고 그런 상투적인 표현이 거의 없고, 쉬운 듯 어렵고 어려운 듯 쉬운 시다. ‘늦고 헐한’ 저녁. 싸구려 간이식당에서 저녁을 사 먹은 시인은 사랑을 (혹..

가곡 '동무 생각'에 얽힌 첫사랑 이야기

박태준 작곡의 가곡 '동무 생각'은 내가 젊은 날에 많이 애창하던 노래다. 아이들을 학교에 입학시키고 바로 어느 합창단에 입단할 때, 지휘자가 오디션 겸 파트를 결정해 줄 때 내가 불렀던 노래가 '동무 생각'이었고 그때 지정받은 쏘프라노 파트로 평생 합창단을 전전하며 노래를 즐겼으니 잊을 수 없는 나의 애창곡인셈이다. 그런데 얼마 전, 내가 좋아하던 그 노래에 얽힌 사연을 우연히 알게되었는데... 무심코 좋아했던 노래에 그토록 아름답고 예쁜 첫사랑 이야기가 숨겨있었다니! 더욱 아련하게 가슴에서 그 노래가 울려퍼지게 되었다. 몇 년 전 대학 동기들과 대구에 간 일이 있었는데, 대구에 사는 친구가 청라언덕에 우릴 데리고 갔던 일이 떠오른다. '여기가 선교사들 집이고, 여기가 청라언덕 계단이고...' 하면서 ..

기차는 8시에 떠나네

https://youtu.be/lYG696u6nHs 계절 탓인지 몸이 아프다. 일년 중 제일 싫어하는 달 3월을 보내느라 힘이드는가, 혹시 코로나 오미크론에 걸려버렸나 의심도 해보았지만 그건 아닌것 같은데..., 왜 이렇게 몸과 마음이 쳐지고 아픔이 계속되는지... TV 어떤 예능 프로를 보다가 느닷없이 주인공과 함께 눈물을 흘렸다. 음악과 다른 예술 분야에서도 재능이 뛰어난 청년 누가 보아도 성공한 연예인으로 보이는데, 아무에게도 속 마음을 털어놓지 않던 그 젊은 청년은 눈물을 보이며 인터뷰를 하고있었다. 너무 괴로워 마침내 정신과 치료를 받고 있다고..... 보이는 현실과 달리 전혀 행복하지 않은 그 이면의 우울을 보면서 너무 공감을 하던 나머지 눈물이 쏟아진 것이다. 몸과 마음이 슬퍼서일까, 요즘 ..

살고 싶은 집의 입구

이 현관 그림은 미국의 인상주의 화가 애벗 풀러 그레이브스(Abbott Fuller Graves·1859~1936)가 그린 작품이다. 그는 집의 입구를 즐겨 그렸다는데, MIT에서 건축을 공부하다가 화가로 전향하면서 유럽에서 고전적 화풍과 인상주의를 배워 주로 꽃과 정원의 화가로 입지를 다진 화가라고 한다. 나즈막한 울타리의 쪽문을 들어서면 둥근 기둥이 양쪽에서 포치(porch)를 받치고 있는 이 아름다운 현관 그림을 보면서 잠시 짙은 향수에 젖는다. 오래 전에 상영된 '마음의 행로'라는 영화가 있었다. 머빈 르로이(Mervyn Leroy 1900~1987)가 감독한 영화로 그리어 가슨(Greer Garson 1904~1996)이라는 여배우와 로날드 콜맨(Ronald Colman 1891~1958)이 주..

내가 살아보니까

내가 살아보니까 / 장영희 교수(1952.9.14~2009.5.9) 장영희 전 서강대 교수는 평생 소아마비로 살아오면서, 세번의 암과 투쟁하면서도 사람들에게 희망을 전달하던 분입니다. 그분의 글 공유합니다. 내가 살아보니까 내가 살아보니까 사람들은 남의 삶에 그다지 관심이 많지 않다. 그래서 남을 쳐다볼 때는 부러워서든 불쌍해서든 그저 호기심이나 구경 차원을 넘지 않더라. 내가 살아보니까 정말이지 명품 백을 들고 다니든, 비닐봉지를 들고 다니든 중요한 것은 그 내용물이더라. 내가 살아보니까 남들의 가치 기준에 따라 내 목표를 세우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고, 나를 남과 비교하는 것이 얼마나 시간 낭비이고, 그렇게 함으로써 내 가치를 깍아 내리는 바보 같은 짓인 줄 알겠더라. 내가 살아보니까 결국 중요한 것은..

법정스님과 이해인 수녀님의우정어린 편지 ..

●이해인 수녀님의 편지 법정 스님께... 스님! 오늘은 하루종일 비가 내립니다. 비오는 날은 가벼운 옷을 입고 소설을 읽고 싶으시다던 스님, 꼿꼿이 앉아 읽지 말고 누워서 먼 산을 바라보며 두런 두런 소리내어 읽어야 제 맛이 난다고 하시던 스님, 가끔 삶이 지루하거나 무기력해지면 밭에 나가 흙을 만지고 흙 냄새를 맡아 보라고 스님은 자주 말씀하셨지요 며칠전엔 스님의 책을 읽다가 문득 생각이나 오래 묵혀 둔 스님의 편지들을 읽어보니 하나같이 한폭의 아름다운 수채화를 닮은 스님의 수필처럼 향기로운 빛과 여운을 남기는것들 이었습니다. 언젠가 제가 감당하기 힘든 일로 괴로워할 때 회색 줄무늬의 정갈한 한지에 정성껏 써보내 주신 글은 불교의 스님이면서도 어찌나 가톨릭적인 용어로 씌어 있는지 새삼 감탄하지 않을 수..

조반니 세간티니(Giovanni Segantini·1858~1899)

***** 1990년대, 유레일 패스를 사들고 자주 유럽을 여행하던 어느 해, 스위스의 쩨르마트에서 생 모리츠(St. Moritz)까지 빙하특급이라는 관광열차를 타고 아주 처언천히 알프스 산 사이를 누비며 8시간에 걸쳐 도착했었다. 그때만해도 생 모리츠라고 하면 어릴 때 배운 페스탈로찌의 고향이라는 정도밖에 아는게 없었다. 사흘 동안 머물며 생 모리츠 호수를 한 바퀴 돌고, 온천지대를 돌아보며 돌아다니다가 세간티니 미술관을 발견하고 들어갔다. 그에 대해서 아는바가 없는 상태에서 그림들을 돌아보면서 점점 가슴에 스며드는게 있기에 그의 대표작이라는 3부작, 이라는 그림 사진을 샀다. 그 그림들에 대한 사연도 모른채 사왔던 것인데 액자에 고히 끼워 몇 십년 지난 지금까지도 보관하고 있다. 며칠 전, 어느 신문..

그림 2022.02.21

선물(Gifts)

나는 첫사랑에게 웃음을 주었고, 두 번째 사랑에게 눈물을 주었고, 세 번째 사랑에게는 그 오랜 세월 침묵을 주었지. 내 첫사랑은 내게 노래를 주었지, 두 번째 사랑은 내 눈을 뜨게 했고, 아, 그런데 나에게 영혼을 준 건 세 번째 사랑이었지. -사라 티즈데일(Sara Teasdale·1884~1933) 미국의 여성 시인 사라 티즈데일은 서정적인 연애시를 많이 남겼다. 사랑에게 무엇을 준다는 문구의 반복, ‘눈물’ ‘노래’ ‘침묵’ 같은 단어들은 그녀의 다른 시 ‘아말휘의 밤 노래’를 연상시킨다. “나는 그에게 울음을 주고 / 노래도 줄 수 있으련만-/ 어떻게 내 온 생애가 담긴 침묵을 주리오?”로 끝나는 ‘아말휘의 밤 노래’를 줄줄 외다시피 좋아했었다. 첫사랑이 (이 시에서처럼) 웃음과 노래로 시작하는 ..